친박 실세와 가깝게 지낸 총수 일가 등 ‘사정권’…‘오너 리스크 제거’ 적폐청산 드라이브
6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최근 한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에 많은 국민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저학년 초등학생들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잔혹함과 학교 측의 안일한 사태 수습 때문이었다. 특히 몇몇 학생들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가해자 명단에 빠진 것을 두고서 공분을 샀다. 학생들의 배경을 의식해 학교 측이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던 것이다. 여기엔 유력 그룹 회장의 손자도 들어가 있었다. 비난 여론이 쏟아졌고, 교육 당국은 뒤늦게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동시에 재벌 개혁 여론도 확산됐다.
그동안 재벌 일가, 그중에서도 창업주 2·3세가 물의를 일으킨 사건은 비일비재했다. 마약, 음주사고, 폭행 등 여러 건으로 도마에 올랐고 그때마다 재벌들에 대한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수준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그러나 이들이 적절한 ‘죗값’을 치렀는지는 의문이다. 검찰과 법원에 나타날 때 ‘환자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은 이제 익숙하다. 봐주기 수사, 솜방망이 처벌, 사면 및 복권 등도 재벌 하면 연상되는 것들이다.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드러났듯 정경유착의 악습도 여전하다는 평이다.
대기업들이 승계 과정에서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한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그룹 후계자가 지분을 갖고 있는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 덩치를 키운 뒤 그 시세 차익으로 지주사 주식을 사들여 회사 전체를 지배하는 과정이 대표적 사례다. 재벌가 자제들은 막대한 상속세를 내지 않고도 비정상적인 순환출자구도 등을 통해 그룹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몇몇 재벌들은 검찰 수사와 사법 처리를 받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친문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여권 인사들은 재벌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한 충분조건 중 하나로 이러한 ‘총수 일가 리스크’를 뿌리 뽑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재인 캠프에 몸담았던 친문 의원은 “대한민국 기업 중에서 경쟁력을 갖춘 곳은 정말 많다. 그런데 경영권 승계 등 총수 일가 문제 때문에 비자금 조성과 같은 불법적인 일들을 하다 보니 제대로 진가가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우리들의 인식”이라면서 “걸리면 재수가 없었을 뿐이고, 설사 적발되더라도 전관 변호사를 써 형량을 낮추거나 아니면 나중에 사면을 받으면 된다는 게 재벌가에 퍼져 있는 인식”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주요 대선 공약으로 재벌 개혁을 내걸었다. 재벌의 불법 경영승계, 부당특혜를 근절하겠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또 재벌총수의 경제 범죄에 대한 엄격한 처벌 및 사면권 제한도 추가했다. 문 대통령은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주요 참모와 친문 의원들에게 재벌 개혁의 당위성 등을 설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로 꼽히는 김상조 교수를 ‘기업 저승사자’로 통하는 공정거래위원회 수장에 발탁한 것은 문 대통령의 재벌 개혁 의지를 짐작케 한다. 기업 수사에 정평이 나 있는 ‘칼잡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도 문재인 정부의 재벌 개혁을 지원사격할 것으로 점쳐진다.
이런 가운데 복수의 사정기관에서 재벌 2·3세들과 관련된 광범위한 첩보 수집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몇몇 기업을 타깃으로 하는 것이 아닌, 10대 그룹 등 주요 대기업이 대부분 포함된 사실상의 전수조사 성격을 띤다고 한다. 이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한두 개 기업이라면 일반적인 업무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범위가 훨씬 넓다. 30대 (그룹)까지는 거의 다 한다고 보면 된다. 이 정도면 윗선(청와대)의 하명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사정당국 고위인사 역시 비슷한 말을 들려줬다. 그는 “청와대가 컨트롤타워라고 보면 된다. 재벌들의 승계 과정, 그리고 2․3세들의 개인 비리 등이 대상이다. 수사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들을 추려내고 있다. 재계 입장에선 가장 민감하고 아픈 사안들이다. 재벌 개혁의 전초전인 셈”이라고 귀띔했다. 앞서의 친문 의원 역시 “그동안 개혁은 재벌들의 강한 반발에 번번이 좌초됐다. 재벌들의 손과 발을 묶고 시작하겠다는 것 아니겠느냐. 특정 기업만을 노릴 경우 보복 사정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미 여러 건의 사례들이 포착된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10대 그룹 중 한 곳의 재벌가 자제는 계열사를 통해 회사 자금을 유용한 의혹을 받는다. 그룹 내부의 제보자를 통해 물증도 이미 확보됐다고 한다. 사정당국 고위인사는 “그 기업의 경우 오케이 사인만 나면 바로 수사에 나설 수 있는 단계다. 현 정부 기업 수사의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전했다. 검찰에서도 관련 내용이 담긴 정보보고가 상부로 올라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중견기업 총수 아들은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의 불법적인 일들이 상당 부분 드러나 조만간 금융당국이 자금 추적 등에 나설 전망이다. 이 총수 아들은 상습적으로 도박을 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한 유력 대기업 총수 일가를 둘러싼 사정당국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단순한 기업 수사를 넘어 전 정권과의 커넥션 쪽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이유에서다. 이 그룹 총수와 그 아들이 친박 실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여러 특혜를 받았다는 풍문을 집중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지난 2012년 대선 때 친박 주변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핵심 참모와 이 그룹의 총수는 각별한 관계”라는 말이 흘러나온 바 있다. 이 핵심 참모는 지난 정권에서 실세 중 실세로 통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또 이 그룹 총수는 정치권과 금융권 유력 인사 자식들을 자신의 회사에 취업시켜주는 것으로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재계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재벌 개혁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또 다른 노림수가 있는 전형적인 재계 길들이기 차원이라는 생각에서다. 10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정권 초 기업들은 죄인처럼 바싹 엎드려 있곤 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이 어디 있느냐. 이번 정권에서도 눈치만 볼 뿐이다”면서 “다만, 이런 식으로 재벌들의 약점을 잡겠다는 것은 뭔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예를 들면, 세수 확보를 위해 법인세 인상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불거질 기업들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선 총수 문제가 아킬레스건이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정부 시책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친문 의원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적폐 청산의 일환이다. 이걸 하라고 국민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뽑은 것이다. 재벌 개혁에 대다수 국민들이 공감대를 나타내고 있다. 재계를 겨냥한 사정 드라이브로 봐서는 안 된다. 한국 경제에서 재벌의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는 만큼, 보다 더 투명하고 튼튼한 기업을 만들겠다는 차원이다. 따라서 재계도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다. 일탈과 불법을 일삼는 몇몇 총수 일가가 문제지 회사나 직원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총수 리스크가 사라지면 오히려 더 경쟁력 있는 회사로 발전할 수 있다. 기업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일”이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MB·박근혜 정부 기업수사는? 전 정권과 친한 곳 어김없이 칼 겨눠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면 재계엔 전운이 감돈다. 주요 사정 라인 세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어김없이 기업 수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급 의원은 “재계를 확실히 장악해야 임기 5년이 편하다. 신임 대통령에게 기대를 갖고 있는 국민들 앞에 눈에 띄는 실적을 낼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된다. 재벌 총수들이 스포트라이트에 설 때 대통령 지지율은 올랐다. 국면 전환용으로도 활용됐었다”라고 말했다. 특히 지난 정권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거나 인수·합병 성공 등 승승장구했던 기업들은 주요 타깃으로 오르내리곤 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이른바 ‘친 MB기업’에 대해서 대대적인 자료 수집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몇몇 기업이 후보군에 거론됐다. 국세청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연관이 있는 롯데 효성 등을 상대로 세무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 1~4개 부서가 동시에 지난 정권을 겨눴다. 국무총리가 직접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몇몇 방산업체, 포스코, 농협, KT&G 등이 수사를 받았다. 모두 친이 인사들이 개입됐다는 의혹을 받았던 곳이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결국 용두사미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점치기도 했는데, 실제로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해 ‘기획 수사’를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지적이 나왔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태광실업 수사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국세청은 2008년 7월 태광실업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 박연차 회장을 잡기 위해서였다는 게 중론이다. 국세청 최정예부대로 꼽히는 서울청 4국이 대기업도 아닌 지역의 중소기업을 샅샅이 훑은 것을 두고 정치적 해석이 난무했다. 이는 대검 중수부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단초가 됐다. 이듬해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받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