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항상 먼저 낮췄고 먼저 내밀었다
초선 상원의원으로 다른 대선주자들에 비하면 ‘정치신인’이나 다름없던 오바마가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비결은 대체 무엇일까. 오바마 당선인이 직접 쓴 자서전(사진)과 그와 인연을 맺어온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 오바마 캠프에서 아시아 담당 공식 대리인을 맡아 화제가 된 라이언 김 씨 등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어보았다.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지만 그를 주변에서 지켜봐온 이들에겐 ‘당연한’ 결과였다고 한다.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오바마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흑인이 대통령이 된 일 자체는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1984년 미국에 온 김 소장은 한인사회의 생존을 위해선 ‘유권자 의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해 1993년 한인유권자센터를 설립했다. 한인유권자센터는 그간 미 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의 비자면제프로그램 실시에도 큰 힘을 보탰고 지난 여름 독도 문제가 터졌을 때 미국 내에서 가장 빠르게 외교위원들을 방문해 설득에 나섰던 단체다.
오바마가 대중적 인기를 얻기 전부터 인연을 쌓아온 김동석 소장은 대선을 준비하는 오바마 캠프에 “한인 사회와의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라이언 김과 같은 한인들을 많이 쓰라”며 조언했다고 한다. 그후 라이언 김 씨는 오바마 캠프의 아시아 담당 공식 대리인으로 지명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라이언 김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신 분들이 많다. 너무 갑작스럽게 나 혼자만 주목을 받게 된 거 같아 좀 당황스럽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인으로서 오바마와 ‘인연’을 쌓은 두 사람이 본 오바마의 모습은 어떠할까. 김동석 소장이 오바마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7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였다. 김 소장은 당시 전당대회 기조연설자로 낯선 이름의 정치인이 있는 것을 보고 ‘대체 오바마가 누구인가’라며 궁금했다고 한다. 기조연설은 당연히 유명 정치인들의 몫이었는데 둘째 날 연사로 등장한 ‘버락 오바마’는 당시만 해도 매우 낯선 이름이었던 것. 친분이 있던 사이인 메넨데스 의원의 스위트룸에서 오바마와 마주치고 명함을 주고받은 것이 첫 번째 만남이었다. 당시 오바마는 방 배정도 받지 못해 열악하게 연설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둘째 날 연설이 끝난 이후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오바마의 연설은 민주당 지지자들뿐 아니라 공화당 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심지어 ‘오바마를 지지하는 공화당원 모임’이 등장하는가 하면 보수 세력 내에서도 적잖은 이들이 ‘내가 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민주당원’으로 그를 꼽을 정도였다. 김 소장은 당시 오바마의 연설에 대해 “너무나 연설을 잘하고 정치적 감각도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오바마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에서 단골로 지원유세를 다니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 소장이 오마바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년 뒤인 2006년 중간선거에서였다.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메넨데스 의원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러 뉴저지를 방문한 오바마 측에서 한인들에 관해서 알고 싶다며 연락해 온 것. 오바마는 2년 전 보스턴 전당대회에서 만났던 김 소장의 명함을 잊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 소장은 “오바마의 선거운동 방식은 이와 같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힐러리나 매케인 모두 자신을 후원하라는 식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일찌감치 시민단체 세력을 흡수하며 캠페인이 아닌 사회 무브먼트(운동)를 일으켰다. 오바마의 방식은 기존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고 설명했다.
오바마가 대권 도전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품기 시작한 것은 2004년 가을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된 이후였다. 그가 힐러리에 맞설 수 있는 전략으로 택한 것이 당 밖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이는 동부 일대의 소수인종 후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연결됐다. 2005년 9월 뉴저지주 에디슨시 시장선거에 출마한 한인 2세 준 초이 후보(한국명 최준희)를 지원 유세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였다. 당시 오바마는 지원유세에서 “흑인과 남미계 및 아시아인들이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김 소장은 “그때 오마바는 2008년 대선에 나갈 거란 결심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김 소장도 한인 1.5세와 2세들이 유력 정치인의 캠프에 들어가도록 힘썼고 라이언 김 씨 역시 김 소장의 소개로 메넨데스 캠프에 있다가 오바마 캠프로 옮겨가 그를 돕기 시작했다.
이처럼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 내 비주류 인종들의 지지가 큰 도움이 됐다. 김 소장은 “미국인 75%가량이 백인이고 나머지 25%가 유색인종이다. 그중에서도 남미 히스패닉 계통이 12%, 흑인이 12%, 아시안계는 10%에 불과하다. 아시안 중에서도 인도 중국 베트남 필리핀에 이어 한국이 5번째에 불과하다. 소수 중의 소수인 한인 커뮤니티의 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오바마였기에 할 수 있는 일었다”고 평했다.
오바마에게 미국 내 백인 중 절반 가까이(45%)가 표를 던졌지만, 분명 그의 대통령 당선을 바라보는 감회는 흑인과 유색인종들에게 더욱 남다를 것임은 물론이다. 그가 2006년 출간한 자서전 <담대한 희망>을 살펴보면 그가 인종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오바마는 흑인에 대한 차별로 인해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 술과 마약에 빠졌던 일을 자서전을 통해 고백했다. 고급 레스토랑 바깥에서 그가 주차 관리원이 승용차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레스토랑에 도착하는 백인 부부들마다 그에게 예사롭게 승용차 키를 던지거나 그가 쇼핑을 하려고 백화점에 들어가면 경비원이 계속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욕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아내와 나는 TV와 음악은 물론, 친구나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폭언에도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두 딸아이가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오바마는 인종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려면 ‘두 쪽으로 나뉜 스크린’에 이 세상을 비춰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서전에서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아메리카의 모습을 한쪽에 비추고 다른 한쪽에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비춘 뒤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냉소적인 태도나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빠져들지 말고 지난날의 잘못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당면 과제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바마가 미국 내에서 ‘오바마 마니아’를 만들어낼 만큼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데에는 그의 소탈하고 대중친화적인 성격도 큰 몫을 하고 있다. 라이언 김 씨는 “2006년 11월 오바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와 같은 자원봉사자들과도 일일이 악수하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오랜 세월 정치만 해온 기존 정치인들과는 달랐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 자신이 흑인으로 사회의 편견과 맞서 싸워왔다는 점은 흑인들에게뿐 아니라 미국 내의 소수 이민자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 내 소수 이민자 신분으로 정치시민운동을 해온 김동석 소장은 “오바마 정부에서는 굉장히 소프트한 권력이 만들어질 것이다. 소프트하다는 것은 누구든지 정당한 요구와 목소리를 가진 시민이면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미디어와 여론으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될 것이며 기존에 기득권을 누린 워싱턴 정치집단이 아닌 풀뿌리 민주정치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소장은 이어 앞으로 한국의 대미관계는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며 ‘조언’을 건넸다.
“앞으로 한국의 대미 관계는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미국에게) 줄 것은 적고 얻을 것이 많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외교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 미국 내의 한인들의 힘이 근간이 되는 정치력을 동원해야 한다. 위안부 결의안 문제가 터졌을 때 일본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로비로 해결하려 했지만 우리는 한인 유권자들의 힘으로 직접 부딪쳐 해결했다. 지난 16년 동안 3만 명의 유권자 ‘몰표’를 만들었더니 미국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