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글리시 ‘아이 서울 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민투표로 결정
영국의 <가디언>은 18일(현지시각) “왜 한국의 융성한 수도는 정체성 위기에 직면했나(Why South Korea‘s thriving capital is having an identity crisis)”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한국이 정체성 위기에 빠진 문화적, 경제적 원인을 분석해 18일 온라인판을 통해 보도했다. 사진=가디언 홈페이지 캡처
이 기사는 ‘아이 서울 유(I.SEOUL.U)’ 이외에도 ‘크리에이티브 코리아(CREATIVE KOREA)’, ‘청계천 복원사업’,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서울로 7017’ 등을 차례대로 소개하며, 지난 수년간 시도된 우리나라와 수도 서울의 브랜드 아이덴티티(BI·Brand Identity) 시도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실패 원인을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한 한국이 강박적인 생각과 조급함으로 인해 서구 사회를 무분별하게 모방한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BI 전문가들은 이 기사를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퍼나르며 뼈아픈 지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울러 우리나라가 공공 브랜드 전략에 대해 지속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진짜 이유에 대해 저마다 성토했다.
# 문제는 ‘콩글리시’보다 시민 투표
2015년 10월 28일에는 시민 투표를 통해 1등을 차지한 서울시의 새로운 슬로건 ‘아이 서울 유(I.SEOUL.U)’가 발표됐다. ‘나와 너의 서울’이라는 우리말 해석이 붙었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외국인이 보기에는 쉽게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괴상한 문장이라는 지적이 잇달아 제기됐다.
제작비용만 8억 원. 매년 수십억 원의 홍보예산이 들어가는 새로운 슬로건에 문제가 있다면 누군가는 도의적 책임을 져야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책임을 질 최종 결정권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몇 개의 다른 최종안을 두고, 결국 ‘시민 투표’에 의해 선정됐기 때문이다.
I.SEOUL.U(아이 서울 유)는 seouling(서울링), SEOULMATE(서울메이트) 3개안 중 시민 투표를 통해 최종안으로 선정됐다. 사진=서울시 홈페이지
이처럼 많은 공공기관이 슬로건, 로고, 상징과 같은 BI를 결정할 때 아예 처음부터 시민 공모로 출발하거나, 최종 결정 단계에서 시민들에 의해 투표로 결정된다. 다수에 의해 최선의 결과가 도출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전문가들이 아무리 좋은 안을 낸다고 해도, 결국 결정은 비전문가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라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이 이 같은 방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BI업계 관계자는 “경쟁 입찰을 통해 일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안을 두고 다시 전문가 패널을 구성해 심사하거나 온라인 시민 투표를 거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그것이 바로 진짜 실력 있는 전문가들이 공공기관 일을 기피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유지원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역시 “디자인 행정을 잘못 디자인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전문 인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고 인적자원을 낭비하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잘못됐다고 바꾸는 것이 ‘더 잘못’
‘I.SEOUL.U’처럼 잘못됐다는 지적이 아무리 많아도 한번 시작되면 돌이키기에는 애매한 것이 바로 BI다. 기존 것을 유지하면 최소한 ‘마이너스’는 아니지만, 바꾸면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원자력 발전소처럼 ‘진퇴양난’에 빠진다.
가디언 역시 이러한 점을 잘 지적했다. 약 30억 원을 들여 만든 새 국가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코리아’가 표절 논란으로 인해 불과 1년 만에 폐기된 사실을 소개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배후에 국정농단의 주역인 ‘최순실 작품’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반드시 옳은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대부분 BI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매번 정부가 바뀔 때마다 슬로건을 변경하면 국가 브랜드 전략은 언제나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진=크리에이티브 코리아 홈페이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권력이 바뀔 때마다 국가 슬로건이 계속 바뀌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시민 공모를 통해 ‘다이나믹 코리아’가 탄생했지만,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폐기됐다.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 안홀트가 참여해 만든 관광 슬로건 ‘코리아 스파클링’ 역시 마찬가지. 이명박 정부에서는 ‘코리아 비 인스파이어드(Korea Be Inspired)’,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매진 유어 코리아(Imagine your Korea)’ 등 잦은 변경이 이뤄졌다.
서울시 역시 마찬가지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만들어져 많은 비판을 받은 ‘하이서울(Hi, Seoul)’ 역시 14년 만에 ‘I.SEOUL.U’로 변경됐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국가 슬로건이 자주 바뀌는 이유는 자명하다. 선거에 이긴 정치인들이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국가 슬로건을 단지 털어내야 할 과거 정부의 그림자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공공브랜드 전문가 사이먼 안홀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참을성 부족, 객관성 결여, 지루한 전략, 프로파간다(선전)에 대한 순진한 믿음, 잦은 변경과 지름길에 대한 욕심 등이 국가 브랜드 전략의 보편적 장애물”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한국이 참고해야 할 국가로 일본을 추천한다”며 “일본은 지난 30년간 일관된 브랜드 전략을 통해 전범 국가의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봉성창 비즈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