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일지를 통해 죽은 그와 만났다. 어느 날 노란 치자꽃 한 송이가 핀 화분을 들고 그가 묻혀있는 풍산공원묘지를 찾아가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맑은 물같은 명상을 통해 삶의 진수를 깨달은 것 같았다. 또 다른 형태의 깨달음을 얻은 선배를 봤다. 며칠 전 우면산 자락의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있는 그를 만났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총명한 두뇌와 온유한 성격이라는 축복마저 받았다. 명문고와 서울법대 그리고 고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판사가 됐다. 판사 중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시간만 흐르면 그가 대법관이 될 것이라는 걸 주변동료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인생의 파다를 순항하던 그가 시대의 파도를 만났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군사정권에 차출됐다. 그는 무리하게 남을 밟는 일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오히려 위험에 빠진 인물들을 대통령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소리 없이 도와주곤 했다. 군사정권의 대통령은 그를 특히 애지중지했다.
군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판사출신인 그는 소유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를 정계거물이나 장관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판사라는 직업을 사랑했다. 그리고 다시 법원으로 돌아갔다. 시대의 물결이 방향을 틀어 이제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의 대통령이 군사반란의 수괴가 되어 법정에 섰다.
그의 측근들이 모두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갔다. 그는 군사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는 법관의 옷을 벗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어떤 관직이나 명예직도 사양했다.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가 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예순다섯살이 되는 해에 그는 모든 걸 정리하고 우면산자락에 집을 얻어 경전을 읽는 노인이 됐다.
한번은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데리고 산책하는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다. 다시 십 여년이 흘렀다. 벤치에 혼자 앉아있는 칠십대 후반의 노인인 그를 보고 다가가 인사를 했다. 손자가 어른이 됐을 것 같아 물었다.
“이제 손자 결혼식도 보고 싶으시죠?”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이제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요. 손자결혼식을 보겠다는 것은 생에 대한 집착이고 욕심 이예요.”
이미 그는 어떤 경지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권력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계실 때 그 걸 왜 즐기시지 않았습니까? 그 맛에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반장을 했는데 조회시간에 선생이 아이들을 반듯하게 줄을 세우라고 했어요. 그게 반장인 나의 책임이었죠. 그런데 삐딱하게 선 아이를 봐도 난 말을 못했어요. 그냥 가서 그 아이에게 사정을 했어요. 한번은 줄을 못 세웠다고 선생이 사정없이 나를 때리더라구. 그때 속으로 원망을 하기도 했지. 아이들이 나를 얻어맞게 하기 위해 성질을 알고도 반장을 시켰다고 말이죠. 그게 내 성격이고 운명인지도 몰라요.”
그가 잠시 말을 끊고 침묵했다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내 사위가 검사장인데 이제 그만큼 관직을 했으니 그만두라고 권했어요. 더 올라가려면 정권의 철저한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검찰총장이나 법무부장관이 되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장모인 집사람이나 딸은 그걸 모르지. 손자문제만 해도 그래. 녀석이 예일대에서 공부하면서 외로웠던 것 같아. 여자 친구가 생긴 거야. 엄마하고 외할머니가 공부에 지장이 된다고 난리를 치는 거야. 젊어서 풋풋한 사랑이 평생 얼마나 소중한 마음의 보석인줄 모르고 말이예요. 그래도 손자녀석이 대견한 건 예수를 잘 믿고 방학에 집에 돌아와서도 바로 교회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거야. 학교에서도 성적이 아직까지는 올 에이요.나는 늙어서도 이리저리 한 자리 얻으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악취가 나는 것 같아 싫어요. 정말 그런 인간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깨달음의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산자락에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깨달을 수도 있다. 또 고난과 상실을 통해 몸으로 얻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의 상실은 또 다른 형태의 축복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