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네 살에 맨몸으로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곡괭이 한 자루를 밑천으로 공사판 노동자가 된 그는 건설회사의 사장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부자가 됐다. 그의 칠순잔치에 변호사로서 사회를 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배운 것 없이 혼자 바람 부는 삶의 광야를 건너왔던 그는 부러웠던 게 많았던 것 같았다. 그는 잔치에 전직 장관이나 사회적 명사들을 초청했다. 평소에 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초대받은 그들을 통해 나도 이만한 사람이야 하고 자존감을 높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자신의 공덕비가 여러 개인 걸 꼭 자랑해 달라고 했다.
“공덕비를 언급하는 건 자제하시면 어떨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잔치를 벌이면서 주인공의 경력이나 상을 과대 포장하는 것은 오히려 격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다.
“무슨 소리요? 공사할 때 마다 그 사람들이 세워준다고 약속해서 내 공덕비가 선 건데.”
그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 이윽고 잔치가 시작됐다. 순서에 따라 초대받은 전직 장관의 치사가 있었다. 그는 주빈 영감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입술에서 매끄러운 찬사가 꿀같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 분위기를 맞추는 능력이 있으니까 장관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둔한 인간이었다. 주인공의 답사가 있었다. 영감이 무대로 올라가 마이크 앞에서 입을 열었다.
“나는 평생을 그냥 일만 하고 살았어요. 그거 뭐라고 하더라? 방카스? 아니 박카스? 여름에 사람들이 놀러가는 거 그거 있잖아요. 난 그거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쉬지 않고 공사장에서 집만 지었어요. 잘 지었다고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워주면 그게 그냥 좋았지. 그거 여러 개예요.”
그 영감님의 말을 들으면서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평생 마음 놓고 술 한 잔 하지 못했다. 속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다고 했다. 가족과도 따뜻한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 있는 동굴 안은 고드름과 얼음이 가득할 것 같았다. 그를 보면서 나는 디킨즈의 소설 ‘스쿠리지 영감’을 떠올렸다.
죽은 친구의 영혼이 찾아와 자신의 쓸쓸한 장례식장 모습과 죽은 그를 평가하는 조문객들의 말을 들려준다. 스쿠리지 영감이 비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닫는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인색하게 대했던 서기에게 보너스를 준다. 그리고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 나는 칠순잔치에서 공덕비를 자랑하던 영감님이 죽음을 앞두고 재산목록이 적힌 종이쪽지를 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다.
그 영감님은 많은 재산을 쓰지 못한 채 다시 맨 손이 되어 저 세상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길거리에 버려진 먼지 쌓인 공덕비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사랑의 기억을 새겨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