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가 많았소. 이제 돌아가 보시오.”
나는 순간 그게 끝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회장은 그냥 참고할 말 한마디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일을 시킨 사람에게 품삯을 주겠다는 의식이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기 수리공을 집에 불렀다가 일을 시키지 않아도 차비라도 줘서 돌려보내는 게 세상인심이었다. 그렇다고 후일 비서를 통해 보수를 보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돌아갔다가는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았다.
“회장님 일한 품값은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 그냥 몇 마디 들은 것 뿐 인데?”
회장이 순간 당황하면서 말했다. 그를 알 것 같았다.
“저는 노동을 했습니다. 기록을 검토하고 의견서를 작성했습니다. 그걸 용역이라고 합니다. 주셔야죠.”
“얼마요?”
“십 만원입니다. 지금 바로 계산해 주십시오.”
“내가 지갑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 치과를 갈 시간이라 바빠서”
그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가 살아온 근성을 알 것 같았다. 화가 난 내가 직격탄을 던졌다.
“회장님 왜 이렇게 사십니까?”
그렇게 사니까 소외 되서 산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신이 가족에게조차 버려진 채 돌집 속에 갇혀 사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가 아니꼽다는 듯이 되물었다. 대한민국에서 부자인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사기를 당한 듯한 느낌으로 허탈하게 그 집을 나왔다. 그의 밑에 있거나 거래하는 사람들은 참 힘이 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흘렀다. 한때 불같이 일어났던 그의 재산은 권력의 끈이 끊어지니까 모두 재가 되어 날아갔다. 그의 장례식장에 가 보았다. 우글거리는 수많은 직원 중 그 누구의 눈에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조의를 표하면서 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친척 중에 회사의 경리부 직원부터 시작해서 사장까지 올라간 아저씨가 있다. 그가 입사시험을 치고 막 회사에 들어갔을 때 대학 1학년이던 낸가 그 회사에 간 적이 있다. 친척 아저씨는 위에서 회사달력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자 번개같이 구석에서 달력을 꺼내 꼼꼼하게 포장지로 싸고 있었다. 워낙 눈치 빠른 분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는 성격이었다. 술꾼이던 아버지는 사촌처남이자 대학생이던 그를 항상 막걸리집의 술상대로 불러 앉혔다. 그는 힘들어도 아뭇 소리하지 않고 아버지의 술주정을 받아주었다. 그런 성격은 회사 오너의 신임을 얻은 것 같았다. 그는 그룹 오너를 측근에서 칠십대까지 모시다가 사장으로 회사생활을 마쳤다. 이 사회에서 조직의 사다리 끝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인내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인생을 결산한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회장님을 모시면서 부자들을 참 많이 봤어. 부자들이란 존재는 돈을 줄 듯 줄 듯 하면서 사람을 부려. 결국은 안 주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부자가 되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줄 돈을 안주고 돈을 아껴도 때가 되면 그 돈들이 다 날아가 버리는 거야. 빼앗기기기도 하고 말이지. 재벌회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겉으로는 신문에 사진이 나와도 알고 보면 다 부자가 돈을 빼앗기고 곤욕을 당하는 순간이야.”
나는 다음 말을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회가 돈이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아. 그러니 적당한 때에 잘 쓸 줄 알아야 해. 마음에 우러나는 기부도 하고 말이야. 나는 평생 기업의 직원으로 있었어. 회사원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나 판단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많았어. 까라면 까야 하는 거고 시키면 그게 불법이라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오너는 너 내 돈 받아먹고 사는데 그 정도 충성을 못해?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 사실은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 거지 그 돈을 거저 받는 게 아닌데 말이야.”
권력이 부자를 털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자가 가난한 집 자식들의 영혼을 빼앗고 머슴으로 만드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마음으로 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