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내각 당위원회 책임 일군으로...‘의형제’ 최룡해 입김, 가문적 배경 등 고려된 듯
북한에서 2013년 12월 처형된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최측근이었던 문경덕(붉은 원) 전 당 비서국 비서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5월 23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TV에 등장했다. 좌측 하단은 문경덕의 대표사진. 연합뉴스
지난 5월 22일 북한의 <조선중앙TV>는 2011년 5월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정숙평양방직공장’을 시찰한 기록영화(제목-국산화의 기치를 들고)를 방영했다. 이 기록영화에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장성택 숙청 뒤 중앙무대서 함께 사라졌던 문경덕이다.
보통 북한 내에서 숙청 및 처형된 인사들은 영상에서 철저하게 편집된다. 이러한 전례를 비춰봤을 때 정규방송에 여과 없이 문경덕이 등장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연합뉴스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들 역시 이 점을 비중 있게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던 문경덕이 기록영화에 등장하게 됐는지 그 배경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북한 내부관계자를 통해 이와 관련한 문경덕의 신변에 대해 추적했고, 최근 그의 복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경덕은 영상에 등장하기 한 달 전인 지난 4월 이미 평양으로 복귀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가 복귀한 직책은 내각 당위원회 소속의 책임 일군이다. 내각의 당위원회는 한국의 국무조정실에 해당한다. 과거 평양시당 책임비서 직함과 비교하자면, 영전은 아니지만 숙청된 그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결코 나쁜 자리는 아닌 셈이다.
이 때문에 평양 안팎에서도 문경덕의 이례적인 복귀를 두고 이런 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우리로 치자면 문경덕의 복귀는 최고의 ‘핫이슈’인 셈이다.
앞서의 관계자를 통해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문경덕이 평양시당 책임비서 자리에서 물러난 시기는 장성택이 숙청되고 약 4개월 뒤인 2014년 4월로 확인된다. 1차적으로 문경덕은 김일성고급당학교로 좌천돼 혁명화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문경덕의 좌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학습 과정에서 음주를 하는 과오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그해 말 평안남도 평원군 영원읍의 상하수도 노동자로 2차 좌천 처리된다.
북한은 2013년 장성택 처형 직후 해임된 문경덕의 모습을 기록영화에서 삭제한 바 있다. 조선중앙TV는 2014년 4월 15일 오후 김정은 제1위원장의 금수산태양궁전 건립 업적을 다룬 기록영화 ‘영원한 태양의 성지로 만대에 빛내이시려’를 재방송하면서 문경덕이 나왔던 장면을 빼고 기존에 없던 다른 화면으로 대체했었다. 위 사진은 문경덕(위 붉은 원안)의 모습이 포함돼 있던 2013년 12월 13일 기록영화 첫 방송분. 아래사진은 그가 없는 다른 화면으로 대체한 2014년 4월 15일자 재방송분. 연합뉴스
사실 이 두 차례에 걸친 문경덕의 좌천 역시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다. 문경덕은 대역죄로 처형된 장성택의 손꼽히는 측근인사이며 심복으로까지 불렸던 인사다. 그런 인사치고는 ‘솜방망이’에 가까운 처벌인 셈이다. 그와 달리 수많은 장성택계 인사들은 정치범수용소행을 포함해 매우 강도 높은 처벌을 받아왔다.
그는 1996년 청년동맹 비서를 역임할 당시 당 청년사업부장이었던 장성택을 보필했다. 문경덕은 2002년 당중앙위 근로단체부 부부장직을 맡았을 당시, 장성택을 보좌하며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조직지도부 당 생활지도 부부장과 평양시당 책임비서 등 요직을 거쳤던 것도 장성택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이때 중앙당 비서국 비서도 겸했는데 이는 북한 조선노동당 역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런 인물이 애초 ‘솜방망이’에 가까운 좌천 조치를 받고, 게다가 지난 4월에는 중앙무대로 복귀했다는 것은 평양 내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배경을 두고도 벌써부터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최룡해는 문경덕과 ‘의형제’로 지낸 사이다. 그는 문경덕의 복귀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연합뉴스
여담이지만, 문경덕은 (좌천 과정에서 사고도 있었지만) 술과 친하고, 평소 아코디언을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등 음주가무를 즐겨 주변 동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당 선배인 최룡해와의 친분도 그렇고, 2015년 4월 처형된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과도 술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두 번째로 문경덕의 가문적 배경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문경덕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문성술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다. 문성술은 주인도네시아 북한대사, 평안남도 행정위원장, 당 경공업부 부부장을 거쳐 마지막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그것도 북한의 모든 간부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조직지도부 본부당위원회 책임비서)까지 오른 인물이다.
중앙당에서 함께 근무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문성술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문성술은 그만큼 조직 내에서도 정평이 날 정도로 호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선대 김일성 주석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까지 두루 인정받고 아낌을 받았던 인사다.
문성술은 1997년 고난의 행군 당시 투옥돼 옥사했다. 김정일은 당시 체제 불안이 심해지자 당 주요 간부들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른바 ‘심화조’ 사건이다. 이때 문성술도 옥사했는데, 김정일은 그의 죽음을 두고도 훗날 무척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사정 탓에 그의 아들 문경덕은 아버지의 전과에도 불구하고 영전을 거듭했다. 문경덕의 이례적 복귀 역시 김 씨 가문이 오랫동안 촉망하던 그의 선친과 가문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문경덕 개인적인 노력과 오랜 당무 경력도 한몫했다는 후문이다. 원래 낙천적인 성격의 문경덕은 기약 없는 밑바닥 노동자 생활 속에서도 주변 노동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현장의 인정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중앙에선 그의 이러한 태도 역시 눈여겨봤을 것이란 설명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겸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