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항상 이 자리에…오랫동안 팬 만나고 싶다”
정소림 캐스터. 임준선 기자
[일요신문] 지난 1999년 프로게이머 ‘쌈장’ 이기석이 출연한 TV 광고가 전파를 타며 대중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e스포츠. 20여년이 흐른 현재 스타크래프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게임 장르에서 프로게임단이 만들어지고 많은 게이머가 활동하고 있다. 최근 들어 K리그 성남 FC나 유럽 대형 축구팀 파리 생제르망, 발렌시아 CF 등도 e스포츠 팀을 운영하고 있다. 브라질의 축구황제 호나우두도 e스포츠 팀 지분을 인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e스포츠가 전통 스포츠와의 경계를 허물며 하나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주축이 되는 게이머는 물론 투자자, 방송사 등의 노력이 뒤따랐다. 그 중에서도 e스포츠 주역들과 팬들을 연결해준 중계진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일요신문>은 9월 12일, 18년째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정소림 캐스터를 만나봤다.
# 근황, 제2의 전성기
팬으로부터 받은 생일 선물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로 게임계에 발을 들여놨고 팬들에게 얼굴과 이름을 알린 그 이기에 현재 스타 중계에서는 한 발 물러나 있는 그의 근황을 모르는 이도 많다.
하지만 정 캐스터는 여전히 자신의 위치에서 그동안 해왔던 일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오버워치’ 중계를 맡아 리그를 이끌어가는 중이다.
그는 “오버워치에 관심이 없는 팬들은 저의 모습을 보기 힘들겠지만 저는 항상 제 자리(스튜디오)에 있다”라며 근황을 전했다.
‘핫식스 오버워치 APEX 시즌4’가 주로 열리는 매주 화요일이나 금요일, 상암동 e스타디움 현장은 정 캐스터가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현장을 가득 메운 팬들 중 경기에 나서는 선수보다 정 캐스터를 응원하러 온 이들도 상당수이다. 이들은 응원 배너를 손에 들고 경기를 지켜보기도 한다.
정소림 캐스터 응원배너
중계방송이 마무리된 늦은 시간에도 일부 팬들은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중계를 마친 정 캐스터에게 선물을 주거나 그와 셀카를 찍으려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부쩍 많아진 자신의 인기에 대해 “오버워치 리그 관중이 특히 여성 비율이 높다. 남녀 성격 차이가 반영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라며 조심스레 분석했다.
“물론 남성팬들도 저를 좋아해주신다. 하지만 ‘사인해주세요, 사진 찍어주세요’정도다. 반면 여성팬분들은 훨씬 적극적이다. 자꾸 뭔가를 주려고 하고 더 용감하게 행동하신다. 저는 물론 남녀팬 가리지 않고 모두 환영한다.(웃음)”
# 누구보다 다양한 종목을 경험한 캐스터
정소림 캐스터는 지난 18년간 누구보다도 다양한 게임 중계를 맡아왔다. 스타로 시작한 그는 카운터스트라이크, 스페셜 포스등 FPS 장르, 워크래프트3, 던전앤파이터, 카트라이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다. 그는 이에 대해 “재미도 있지만 어려운 부분도 있다. 특히 자주 중계를 하지 않는 종목은 익숙해질 만하면 잊혀지기 때문에 힘들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종목으로는 워크래프트를 꼽았다.
“WCG(World Cyber Games) 대회에서 김성식 선수가 우승했을때가 가장 잊지 못할 장면이다. 제가 워크에 대타로 들어가게 됐다. 중계가 어려워서 팬들에게 욕도 먹었다. 그래도 꾸준히 하니까 인정도 해주셨다. 그러면서 워크에 대한 애정이 생긴 상황이었다.”
그는 이어 “그런데 매년 열리는 WCG에서 이상하게 워크에서 우리나라가 우승을 못했다. 항상 유력 우승후보로 꼽혔지만 번번이 실패해서 속상했다. 그러다가 2010년 김성식 선수가 우승을 했다”라며 “갑자기 애국심이 솟아나고 감격스러워서 거의 울면서 중계를 했다. 중계를 마치고선 선수랑 얼싸안고 좋아했다”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 잊을 수 없는 게임, 스타크래프트
지금의 정소림 캐스터를 있게 한 게임은 스타크래프트다. 정 캐스터 본인도 스타의 재미에 빠져 게임 중계를 시작했다. 그저 스타가 재미있어서 미래나 업계 전망 등을 따지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스타 중계를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는지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았다. 오버워치 중계 현장에서 만난 정 캐스터의 열혈 팬은 이 같은 질문을 기자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마침 스타는 지난달 ‘리마스터’ 버전이 출시되며 출시 20년을 맞았지만 다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에 정 캐스터는 “당연히 저도 스타 중계를 하고 싶다. 하지만 제가 하고싶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니다”라며 “섭외가 돼야한다. 리마스터 출시 전에 이벤트 매치에 잠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너무 재밌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하고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PD님들 기회를 달라!”라며 수줍게 바람을 드러냈다.
정소림 캐스터. 임준선 기자
그는 “저도 그 친구들도 시작한지 오래돼서 각별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처음엔 소년들이었는데 이제는 다들 아저씨가 됐다. 결혼한 친구도 있고 애아빠도 있고 어떤 친구는 배도 불룩 나왔더라(웃음)”라고 연신 웃으며 말했다.
# e스포츠 판에서 쌓인 18년의 세월
그는 e스포츠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여성 캐스터다. 남성 중계진으로 범위를 넓혀도 그만큼 꾸준히 활약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최근에는 e스포츠에 발을 들이는 여성 방송인들의 롤모델로도 종종 언급되고 있다.
“가끔 성인인 팬들이 찾아와서 ‘초등학교 때부터 봤어요, 중학교 때부터 팬이었어요’라는 말을 하면 제가 오래하긴 했다는 생각이 든다. 초창기 함께 했던 게이머들이 아저씨가 된 모습을 볼때도 마찬가지다.”
또한 이제는 현역 게이머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세월을 체감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선수들이 무조건 누나라고 불렀다. 그땐 게이머들과 나이 차이가 크게 안 났으니까……. 요즘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어린 친구들은 저를 이모, 고모, 누님 등 다양하게 부른다. 캐스터님, 소림좌라고 하기도 하고요.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절대 못하게 할 거다(웃음). 다만 이제 ‘누나’라는 표현이 제가 부담스럽기도 하더라. 방송 중에 무심코 게이머에게 ‘누나 좀 보고 얘기해요’라고 했는데 팬들이 불편해 하더라. 이제 조심해야겠다.”
정 캐스터는 초창기 활동하던 게이머들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감회가 새롭다고 한다. 임요환, 홍진호, 강민 등 많은 이들과 친분이 두텁지만 김정민 해설에게는 더욱 각별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 정소림 캐스터와 김정민 해설은 스타에 이어 오버워치에서도 손발을 맞추고 있다.
“정민이를 처음 봤을 땐 정말 반듯한 학생이었다. 저는 그 친구 경기를 중계했다. 그러다 정민이가 해설자로 변신했고 함께 중계를 하기도 했다. 정민이가 군대에 갈 때는 마치 엄마가 아들 군대 보내듯이 엄청 울기도 했다. 그땐 정민이가 군대에 갔다 오면 제가 더 이상 캐스터를 못하고 있을 줄 알았다. 뭔가 영원히 헤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가 계속 이 자리에 있더라. 그래서 초창기엔 게이머들 군대 갈때 많이 울기도 했지만 지금은 잘 안 운다(웃음).”
또한 현재 <OGN>의 오버워치 담당 PD와도 오래된 인연입니다. WCG 옵저버를 하던 19세 소년이 지금은 PD가 돼서 정 캐스터와 함께하고 있다.
그동안 캐스터 생활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는 “아픈 이야기”라며 말을 이어갔다.
“스포츠 판에서 여자 캐스터가 살아남기 굉장히 힘들다. e스포츠가 아닌 정통 스포츠에서도 여자 캐스터를 찾아보기는 정말 어렵지 않나. 저는 매 순간이 위기였다. 특히나 리그를 쭉 진행해 나가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예선은 제가 맡았지만 본선에서 캐스터가 교체되기도 했고 다음 시즌에 캐스터가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만 둬라, 애 엄마라서 안 돼’ 같은 말도 들어봤다.”
# 18년 장수의 비결, 가족의 존재
정 캐스터는 이 같은 위기에도 꾸준한 활동의 원동력으로 가족을 꼽았다. 학교 방송반 커플에서 결혼에 이르게 된 남편은 처음 게임 중계를 정 캐스터에게 추천했을 정도로 적극 지원했다. 올해 고3인 아들은 정 캐스터의 가장 큰 팬이자 지원군이다. 게임에 관심이 많고 새로운 소식에도 민감한 아들은 정 캐스터에게 도움도 주고 있다. 아들을 고3으로 키우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친정어머니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정 캐스터는 아들에 대해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고 쿨한 성격이었다. ‘엄마 일하러 갈게’라고 말하면 그냥 ‘응 잘 갔다와’라고 대답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칭얼댈 수 도 있었는데 말이다. 저 같은 ‘워킹맘’에게는 너무 고마운 아들이다”라고 칭찬했다.
게임 캐스터의 아들인 만큼 정 캐스터의 자녀도 게임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엄마와 아들은 게임을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많다. ‘게임을 하려는 아들’과 ‘못하게 하는 엄마’의 싸움이다. 정소림 캐스터의 경우는 어떨까요?
“아이가 게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게 했다. 오히려 너무 제한을 두면 더 하고 싶어 질 것 같아서 주말에는 원없이 게임을 하게 했다. 대신 주중에는 안한다. 주중에 약속을 어기면 주말에도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주말이라고 해서 아이가 게임만 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거기에 자기가 푹 빠지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알아서 다른 일도 하더라.”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이후에는 정 캐스터의 ‘개입’이 더 잦아졌다. 입시를 앞둔 현재는 당분간 마우스를 놓기로 했다고 한다.
아들의 존재가 알려져 있기에 많은 e스포츠 팬 사이에서 ‘게임을 잘 이해해주는 정소림 캐스터가 엄마인 그 아들이 부럽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곤 했다. 이에 대해 정 캐스터는 “실제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서로 게임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면 다른 쪽으로 대화가 연결이 되기도 한다. 저희는 격 없는 엄마와 아들 사이다. 아이는 엄마가 게임 캐스터라는 사실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힌디”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은 제가 강요하는 부분도 있다. ‘이런 엄마는 전 세계에 나밖에 없을 걸?’ 하면서(웃음).”라고 덧붙였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아들의 입시가 끝나면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는 희망 사항도 밝혔다.
정 캐스터는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유럽 여행을 하면서 영감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며 “같이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정소림 캐스터는 “오랫동안 게임 캐스터 활동을 하고싶다”는 바램을 드러냈습니다. 임준선 기자
지나온 18년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단지 스타가 좋아서 앞뒤 가리지 않고 방송에 뛰어들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정 캐스터는 “그냥 지금처럼 주어진 일 열심히 하면서 오랫동안 중계하고 팬 여러분과 만났으면 좋겠다”라며 “그러다가 화면에서 제가 봐도 너무 늙어 보이면 그땐 제가 알아서 그만두고 싶다”라고 크게 웃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게임 캐스터 정소림 모자의 게임실력은? 정소림 캐스터는 지난 약 18년간 게임 캐스터로 활약해왔다. 오랜 시간 쉼없이 게임과 함께 지내온 그의 게임 실력은 어느 정도 일까? 그리고 어려서부터 ‘조기 교육’을 받았을 그의 아들은 과연 게임을 잘할까? 정 캐스터가 직접 입을 열었다. 그는 “안타깝지만 제가 손이 빠르지 않다. 중계를 하려면 직접 게임을 해봐야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는 하지만 실력이 좋지는 못하다. 요즘은 중계가 있는 만큼 오버워치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중하위 수준이다”라며 웃었다. ‘그럼 브실골(브론즈, 실버, 골드. 약 상위 40% 이하) 정도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골드(약 상위 68~40%) 언저리(?)라고만 말하겠다”라며 덧붙였다. 정 캐스터는 아들에 대해서는 “일단 게임에 재능이 있지는 않아서 제가 ‘너는 게이머는 안되겠다’며 놀리기도 했었다. 게임을 즐기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라며 “예를 들면 스타를 하더라도 경쟁을 하기보단 맵을 제작하는 식이다. 리그오브레전드도 ‘팀원에게 내가 피해를 준다’며 스트레스를 받더라”라고 덧붙였다. 한 때 오버워치를 열심히 하는 듯 했지만 현재는 고3이기에 잠시 게임을 멀리하고 있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