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젊은이로서 나를 돌아보게 만든 영화”
지난 6월 이제훈은 영화 <박열>에서 일본을 거점으로 항일 운동을 하던 박열 역을 맡아 희대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제 발로 일본 교도소에 수감되고 갖은 고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턱턱 내뱉으며 관객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었던 이제훈. 그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철두철미하고 깐깐한 공무원 박민재로 분했다. 담당 구청의 블랙리스트인 옥분(나문희 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며 올가을 최고의 복병으로 꼽히는 영화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자로 잰 듯한 5 대 5 가르마와 안경을 낀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모습을 직접 고안했다고.
“맞아요. 제가 캐릭터를 구축한 후 의상, 헤어팀과 의논해서 완성한 모습이에요. 옥분의 시선으로 봤을 때 구청 직원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을까요? 깐깐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고 ‘만만한 상대가 아니구나’라고 느꼈겠죠. 사무적으로 일처리는 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미가 부족할 것 같은 모습이에요. 하지만 유일한 혈육인 영재를 챙기기 위해 그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민재가 옥분과의 관계를 통해 따뜻해지고,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예요.”
―겉으로 보면 그냥 휴먼 드라마 정도로 보이는 이 영화가, 실제로는 위안부를 소재로 다뤘다.
“저도 그런 소재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시나리오를 넘기기 시작하다가 중후반부에 옥분의 사연을 알게 돼 깜짝 놀랐어요.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봤는데 이야기가 정말 훌륭했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김현석 감독님의 결이 살아 있는 영화고, 공동제작하는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참여하게 됐죠.”
―나문희와의 소통은 어땠나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옥분은 나문희 선배님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무조건 하셔야 되는 작품이었죠. 처음에는 워낙 어릴 적부터 봐온 대선배님이라 ‘감히 일대일로 연기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대사 한 마디 제대로 내뱉을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런데 워낙 상냥하게 제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주시니 무장해제된 것 같아요. ‘어떤 대사를 치고, 어떤 호흡으로 연기를 해야지’라는 계산이나 계획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게 따로 필요 없었어요. 그냥 곁에서 선배님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극중 제가 영어를 가르쳐드리는 장면에서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끌리는 느낌이었죠.”
사진제공=영화사 시선
―유창한 영어 솜씨가 인상적이더라. 실제는 어느 수준인가.
“(웃으며) 간단하게 의사소통만 할 정도예요. 촬영이 시작되기 전 1~2달 정도 배웠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귀를 열려고 노력했어요. 미국 뉴욕 브루클린 쪽에서 공부한 선생님에게 뉘앙스나 톤을 배웠죠. 특히 영어 대사를 할 때는 그 선생님이 현장에 함께 계시면서 코치를 해줬어요. 극 중 영어를 배운 옥분이 미국 청문회에서 ‘하우 아 유?’(How are you?)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온몸이 짜릿했어요. 영화 초반에는 단순한 인사였던 한 마디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큰 감동을 줄지 미처 몰랐죠. <박열>을 찍을 때는 일본어 대사가 많아 일본어를 공부했는데 그렇게 단련해왔던 것이 <아이 캔 스피크>를 앞두고 영어 공부할 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제훈 특유의 ‘착한 남자’ 이미지가 잘 살았다. 김현석 감독은 어떤 면을 보고 이제훈을 선택했다고 하나.
“딱히 별 말씀은 없으셨어요. 시나리오 봤을 때 그냥 제가 떠올랐고, 주변에서도 ‘이제훈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셨다고 해요. 감독님의 전작들을 보면 ‘김현석의 남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김현석 감독은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조작단> <쎄시봉> 등 일련의 작품에서 착한 남자 주인공의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저도 같은 궤를 이룰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번에 감독님을 처음 만났는데 이미 만난 적이 있었던 것처럼 편했어요. 감독님의 세계에서 편하게 연기한 것 같아요.”
―<건축학개론>의 승민이 기억에 남는다. 반면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수지로 쏠린 것이 아쉽지는 않나.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첫사랑과 관련된 영화를 언급할 때마다 <건축학개론>이 손꼽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웃으며) 제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첫 사랑에 대해 또 다시 기억에 남는 영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같이 출연하는 배우들의 조화와 앙상블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작품 안에 잘 스며들었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섭섭함은 없어요.”
―반면 전작인 <박열>에서는 이준익 감독이 이제훈의 반골 같은 기질을 이끌어 냈다. 왜 감독들이 이제훈에게서 상반된 모습을 볼까.
“제 장편영화 데뷔작인 <파수꾼>과 <고지전>에서는 센 이미지를 보여줬어요. 이런 초창기 저의 모습을 기억해주시고 박열이라는 인물에 대입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로서는 영광이었죠. 이준익 감독님은 배우에게 믿음과 신뢰를 보내주시는 분이세요. 같이 작업을 하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 많이 배우는 기회가 됐어요.”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그런 고민은 없었어요. <박열>을 찍은 후 <아이 캔 스피크>에도 참여할 용기를 얻었죠.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는 영화들은 여러 가지 출발점을 갖는데, 저는 영화를 보는 재미와 장르적 쾌감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 작품들에 출연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진 것 같아요. 제가 그런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굳이 어떤 배경이나 계산을 갖고 미리 겁낼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도 <아이 캔 스피크> 참여를 두고 꽤 고민하고 망설였다고 들었다.
“망설인 시점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좀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요.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친숙한 극영화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자칫 누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죠.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었을 때 우리의 의도가 잘 표현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죠. 결과적으로 제 기대 이상으로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아 기뻐요.”
―영화 시사회 전까지만 해도 <아이 캔 스피크>가 위안부를 소재로 다룬 영화인지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의도된 바였나.
“영화가 공개되기 전에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죠. 하지만 관객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보러 오시면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반성을 하는 기회였어요.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이로서 이런 역사를 인식만 했을 뿐,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죠.”
―다음 이제훈의 행보가 궁금하다.
“제대로 된 액션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와 같이 젊은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작품 말이에요. 복싱 영화도 좋아요. 송강호 최민식 하정우 강동원 선배님들과도 함께 작업해보고 싶고요.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안진용 문화일보 기자
‘일흔여섯’ 나문희 “이 나이에 주인공 하는 기분, 아무도 모를걸~” 세상과 소통하며 연륜을 쌓아온 노장이 발휘하는 힘은 강하다. 세대를 아우르는 따뜻함은 그들의 무기.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들의 이야기 역시 더 큰 공감을 낳는다. 1941년생, 올해 76세인 현역배우 나문희도 그렇다. 사라지지 않는 에너지로, 지난 추석 연휴에 내놓은 주연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진심을 담아 완성한 이야기다. 사진제공=영화사 시선 “이 나이에 주인공을 한다는, 그 기분은 아무도 모를 거다. 내 나이가 돼 봐야 알 수 있는 기분이다. 더욱이 내가 영화를 해냈다는 것! (촬영을) 다 끝내고 나서 ‘아이고, 내가 해냈구나’ 그랬다.” 나문희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매일 구청을 드나들며 온갖 민원을 제기하는 탓에 ‘블랙리스트 할머니’로 통하는 나옥분 역을 연기했다. 그녀는 반드시 영어를 배워야 하는 사정이 있다. 구청에 새로 부임한 9급 공무원(이제훈)이 영어 실력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막무가내로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익히 알려진 대로 <아이 캔 스피크>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이야기다. 주제가 명확하지만 과거 일어난 사건보다 그 피해가 만든 ‘현재’에 주목하며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 영화를 향한 호평과 흥행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촉발되는 배경은 나문희에 있다. 물론 부담 없이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다. 나문희는 “나도 (나옥분처럼) 워낙 자신감이 없고 소심하고, 또 아는 것도 많지 않아 누구 앞에서 말할 때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영화를 곧 자신의 이야기로도 받아들였다는 의미. 이에 더해 “시나리오를 읽고 ‘말할 수 있다’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해방감을 맛봤고, 우선 나부터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영화에서 소화한 영어 대사는 그런 나문희에게 넘어야 할 ‘산’과 같았다. 영어를 배우는 설정, 그렇게 익힌 영어를 활용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장식해야 하는 부담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왕 출연을 결심했으니 몰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문희의 남편은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 은퇴했던 터. 당장 남편의 도움부터 받았다. 슬하에 세 딸을 둔 그는 특히 영어를 잘하는 막내에게 대사 연습을 부탁했고, 영화의 미국 촬영 때는 현지에 사는 둘째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연습보다 실전에 강한 건 역시 배우다. 연습을 거듭하면서도 끝내 부담을 떨치기 어려웠던 나문희는 “가르쳐 준 대로 하면 되겠지 싶어 그냥 했다”며 “미국에서 촬영할 때 무대에 오르고 나니 다들 많이 애를 쓰셨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고, 하니까 다 됐다”고 했다. 사진제공=영화사 시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역은 나문희에게 또 다른 책임감도 안겼다. 영화를 통해 무언가 알리겠다는 사명감이 아닌, 배우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다. 나문희는 촬영 전 제작진과 함께 지낸 고사를 떠올렸다. 당시 그는 “배우로서 한몫을 하고, 또 영화로도 한몫을 하겠다고 다짐했다”며 “위안부 할머니의 사연, 그 분들이 얼마나 지옥을 머릿속에 넣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직 관객의 평가가 남아있지만 작품을 완성한 그는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런 나문희는 요즘 영화 상대역인 이제훈과 ‘무니후니’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나이, 경력을 뛰어넘는 따뜻한 호흡이 보는 이들에 그대로 전해지면서 누리꾼들로부터 얻은 새로운 애칭이다. 나문희는 이제훈의 존재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고 했다. “굉장히 똑똑한 배우로서 긍지를 갖고 잘 해줬다”며 “외할머니, 친할머니처럼 나를 잘 챙겨줘서 처음부터 호흡이 잘 맞았다”며 돌이켰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