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씨는 “입장면에도 거봉포도 밭이 꽤 많이 없어졌다. 살림살이가 안 돼서 정리한 사람, 나이가 많아 폐농을 한 사람이 수도 없다”며 쇠락해 가는 천안 거봉포도의 현실을 설명했다.
그는 “지금 남아서 거봉포도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본이 뒷받침되고 잘 키울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올해 같은 흉년에는 어렵다. 이대로 가다가는 20년을 못버틸 것”이라고 했다.
천안 거봉포도는 1990년대 말과 2000대 초까지 최전성기를 달렸다. 천안시 성거읍과 입장면은 전국 거봉포도 생산의 최고 70%까지도 담당했다. 아직도 천안의 먹거리 하면 호두과자와 함께 거봉포도를 꼽는 이들이 상당수다.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의 한 거봉포도 농장에서 포도가 수확되고 있다. 천안 거봉포도는 재배면적, 재배 농가수가 10년 전보다 반 이상 줄어드는 등 부침을 겪으며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 명성 잃은 천안 거봉포도
그러나 지금은 천안 거봉포도의 옛 명성을 찾기 힘들다.
천안시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2015년 천안시 거봉포도 재배 면적은 798ha(헥타르), 생산량은 9463t(톤)이다. 전국 생산량의 38%다. 여전히 전국 최대이기는 하지만 옛 명성에 비해서는 아쉬운 기록이다.
생산면적과 생산량은 갈수록 줄고 있는 실정이다. 천안 거봉포도 재배면적은 전성기 였던 2000년 1738ha에서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11년 1052ha. 2014년 810ha, 2016년 690ha로 급감했다. 생산량도 2011년 1만5141t에서 지난해 8142t으로 대폭 줄었다.
가장 큰 문제는 포도 농가 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천안의 거봉포도 재배 농가는 2010년 889호에서 2015년 662호로 감소했다. 농가 수는 계속 줄고 있다.
천안 거봉포도의 명성이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약 10년 전 부터라고 한다.
김천·경산·영천 등 캠벨얼리(Campbell Early)를 주로 재배하던 포도 산지들이 거봉포도로 품종을 바꾸면서 천안은 거봉포도 주산지에서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지난 2015년 기준 전국 거봉포도 재배 농가 수는 6114호이며 이 중 경상북도(김천 2274호, 영천 1156호, 경산 746호)의 농가 수가 4417호로 전체 약 72%를 차지한다.
# 거봉포도 쇠락은 한-칠 FTA
하지만 농촌 관계자들이 꼽는 거봉포도 쇠락의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이는 우리나라 농촌의 위기와 상통한다.
첫째는 지난 2004년 체결된 한국과 칠레의 FTA 다. 천안시 농업정책과 이두균 원예특작팀장은 “한·칠 FTA 이후 포도가격이 낮아지면서 천안 거봉포도 농가가 급격히 줄었다”며 FTA를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한-칠 FTA 체결 후 5년 뒤 본격적으로 칠레 포도가 수입되며 천안 거봉포도가 국내시장에서 설 곳이 줄어들게 됐다. 이어 지난 2011년 체결된 한국과 페루의 FTA로 포도 수입량이 늘어나며 천안 거봉포도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초입에 세워진 비석. 입장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거봉포도를 재배한 지역으로, 성거읍과 함께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까지 전국 거봉포도 생산의 약 60~70%를 담당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FTA 이행에 따른 농산물 수입구조 변화와 정책과제’에 따르면 칠레 포도의 수입량은 지난 2010년 3만894t에서 2015년 5만631t으로 크게 뛰었다. 같은 기간 전체 포도 수입량은 3만4963t에서 6만6193t으로 2배 가까이 뛰었다. 포도의 수입액 비중도 2004~2010년 9.9%에서 2011~2015년 16.7%로 증가했다.
국내 포도 재배면적은 지난 2000년 29ha에서 2011년 17.4ha로 줄었으며 같은 기간 생산량도 47만6000t에서 26만9200t으로 반 이상 줄어들었다.
수입 포도의 시장 점유율이 늘어나며 폐농가수도 늘어났다. 실제 지난 2015~2016년도 천안 지역의 FTA 폐업지원을 신청한 포도 농가 수는 199호에 이른다.
둘 째는 농산물의 기형적인 시장구조다.
박현희 씨는 “포도 생산 농가와 재배량이 줄어들면 가격은 올라야 하는데 가격은 십 몇년 째 그대로다”라며 “정부는 국내 물가 안정을 위해 농산물 가격을 가장 먼저 낮춘다. 생산비는 꾸준히 오르는데 가격이 그대로이면 농민들은 무엇으로 수익을 얻어야 하냐”며 한탄했다.
입장면에서 거봉포도를 재배하는 민 아무개씨도 “포도 생산이 줄었지만 포도 가격은 그대로다. 수입 포도가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과 농수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국산 포도(캠벨얼리)의 가격은 지난 2004년 1kg당 6332원에서 2011년 6860원으로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 포도 가격은 대동소이했다.
반면 같은 기간 시설포도의 10a(에이커)당 생산비는 404만 원에서 542만 원으로 급등했다. 거봉포도 역시 2006년 2kg당 7273원(도매가격)에서 2017년 9600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박현희 씨는 “포도를 수입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생산비 차이가 크게 난다. 가격 경쟁이 안 된다. 정부에서는 친환경, 고품질만 강조하며 농촌 스스로 경쟁력을 가지라고 하는데 우리 포도 품질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당도도 정말 높다. 문제는 시장구조”라고 주장했다.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의 한 거봉포도 농장. 거봉포도가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심각한 고령화도 쇠퇴에 한 몫 한다.
천안시농업기술센터 입장지소 관계자는 “입장과 성거에서는 60대가 젊은 축에 속한다. 귀농 자체가 많지 않으며 포도 품목으로 귀농한 세대는 없다. 또 귀농한다 하더라도 농법을 익히려면 5년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봉포도의 명맥을 이을 인적자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 농촌 살리기 위한 근본 대책 절실
천안시는 거봉포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는 포도전문유통센터와 수출센터를 건립해 지난해부터 수출을 시작했다. 지난해 3개국에 100t을 수출했으며 올해도 100t 수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우량 묘목과 시설 설비, 토양개량제 등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로는 역부족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평가다. 단기처방은 될 수 있지만, 근본적 대책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현희 씨는 “농산물 최소가격 보장제이든, 6차 산업 활성화든 농민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 요건을 마련해 줬으면 한다. 지자체와 농협이 이런 농촌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이를 정부와 국가기관에 알려서 대책을 마련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두균 원예특작팀장은 “천안지역 거봉포도 농가는 현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비자들의 입맛이 변하는 만큼 품종 개량을 통해 이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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