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음서제’ 임원 자녀 특채부터 ‘뒷문’ 통해 들어오는 낙하산까지
지난 9월 22일 ‘금융 검찰’로 불리는 금융감독원 여의도 본사에 ‘진짜 검찰’이 들이닥쳤다. 신입 직원 채용 비리로 감사원의 철퇴를 맞은 금감원을 압수수색하기 위해서였다.
금융감독원이 채용비리와 관련해 감사원 철퇴에 이어 검찰의 압수수색까지 받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감사원에 따르면 2015년 10월 말 당시 금감원 총무국장 이 아무개 씨는 지인으로부터 “신입직원 채용시험 지원자 A 씨가 필기전형에 합격할 수 있는지” 등을 문의하는 전화를 받은 뒤 채용 담당자에게 메신저로 해당 지원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주고 합격 가능 수준인지 물었다.
이 국장은 “아슬아슬한 상황”이라는 보고를 받은 뒤 3개 분야(경제·경영·법학) 채용 예정 인원을 각각 1명씩 늘리라고 지시했다. A 씨는 경제학 분야에 지원했는데 필기전형 합격자는 채용 예정 인원 11명의 2배수인 22명까지였고 A 씨는 23위로 탈락할 상황이었다. 결국 A 씨는 이 국장의 지시에 따라 필기전형에 추가로 합격했고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했다.
이번 채용비리에는 금융 관료 출신 금융지주사 대표 B 씨와 수출입은행 고위 임원 C 씨가 연루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C 씨는 채용비리로 합격한 금감원 직원 A 씨의 아버지다. B 씨가 수출입은행 행장을 맡던 시절 C 씨는 행장 비서실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지난 25일 아침 금감원 채용 비리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김용환 농협금융지주 회장의 자택과 집무실 등 8곳을 압수수색했다. 압수수색 대상에는 김 회장에게 아들의 금감원 채용을 청탁한 수출입은행 C 임원의 사무실도 포함됐다.
금감원의 채용 청탁 논란은 2014년에도 불거졌다. 당시 금감원 변호사 경력직 채용전형에 로스쿨을 막 졸업한 임 아무개 전 국회의원 아들 D 씨가 지원했고 금감원은 맞춤형 항목을 신설해 D 씨를 채용했다. 임 전 의원은 당시 최수현 금융감독원장과 행정고시 동기로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이 “최 전 원장과 임 전 의원의 개입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불기소 처분을 하면서 처벌 대상에서 빠졌다.
금융사들을 감시해야 할 금감원이 이처럼 앞장서 채용비리를 저질러 왔으니 피감기관인 금융사들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17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서는 우리은행 특혜채용 의혹이 불거졌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우리은행이 지난해 신입 일반 행원 공채에서 금감원과 국정원 등 유력 인사들과 VIP 고객들에게 채용 청탁을 받아 합격시킨 정황이 있다고 폭로했다.
심 의원 측은 우리은행 내부 제보자에게 해당 내용을 넘겨받아 문건으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심 의원은 국감장에서 인사청탁을 한 인물로 이상구 전 금감원 부원장보를 지목했다. 이 전 부원장보는 이미 변호사 특혜 채용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문건은 외부 추천자와 우리은행 측 추천인, 응시생의 생년과 학력, 비고 등으로 구성됐다. 외부 추천자가 추천하면 우리은행 관계자가 이를 내부에 전달한 방식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 추천자의 경우 금감원 부원장보와 금감원 직원, 국정원 직원, 전 행장과 전 부행장 등이 포함됐고 이들이 자신의 자녀와 지인의 자녀, 처조카, 조카 등을 ‘추천’한 것으로 돼 있다.
몇 안 되는 순수 민간금융사인 신한금융그룹도 임원 자녀 채용 논란에 휩싸여 있다. 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유독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는 직원이 많기 때문이다.
민간금융사인 신한금융도 임원 자녀 채용논란에 휩싸였다. 연합뉴스
홍성균 전 신한카드 사장 아들도 신한카드에 경력직원으로 입사했고, 지난 3월 퇴임한 한동우 전 신한금융 회장의 아들도 신한은행에 경력직으로 채용돼 최근 행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지점 중 하나인 뉴욕지점에 발령받았다. 임영진 현 신한카드 사장의 딸, 김형진 현 신한금융투자 사장의 아들도 현재 신한카드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 서진원 전 행장의 아들 역시 신한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경쟁을 거치지 않고 특별대우를 통해 취업하는 ‘현대판 음서제’는 보험, 카드, 저축은행 등 2금융권에서도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다. 오히려 2금융권은 대기업이나 은행 등의 계열사인 경우가 많아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 채용되는 사례가 더 잦다는 게 업계 전언이다.
보험사의 경우 아예 직원추천제를 암암리에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과거 보험사가 선호 직장이 아니었던 시절, 직원 채용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입됐던 직원추전제는 취업난 속에 금융사가 신의 직장으로 떠오르며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뒷문’은 여전히 열려있다는 것이 금융권의 전언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보험사 직원추천제는 자신의 자녀를 추천하기보다 취업 청탁 등을 받았을 때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안다”면서 “특히 지방 지점의 경우 현지 채용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몇 년간 지역에서 근무한 뒤 본사로 옮기는 케이스도 있었다”고 전했다. 일부 금융사들은 서류 전형 등을 외부에 용역을 주는 방식으로 청탁을 차단한다고 하지만 금융권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외부용역이야말로 청탁의 창구”라고 입을 모은다.
모 은행 고위 간부는 “차라리 내부에서 심사를 하면 나중에 뒷말이 나올까 조심이라도 하지만, 외주 업체는 그런 걱정이 거의 없다”면서 “‘을’의 입장인 외주 업체가 내부 고위 임원의 청탁을 거절하거나 발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나마 대주주가 확실한 대기업 계열 금융사 등은 채용 청탁이 덜한 편이며 ‘주인 없는 회사’인 은행 계열 금융사들이 외부청탁에 취약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거나 과거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한 은행들에 상대적으로 청탁이 더 많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신입사원 채용 시즌이면 하루 종일 걸려오는 민원성 전화 때문에 업무를 제대로 못 볼 지경”이라면서 “정치권이나 관료 쪽 입김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