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유명 건설 영웅 최재하의 장남...김정은 집권 초기 선전선동 큰 역할
지난 2015년 12월 모란봉악단을 이끌고 베이징(北京)을 방문했던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장(왼쪽)의 모습. 오른쪽은 중국의 쑹타오 대외연락부장.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 기존 최룡해에서 최휘로 교체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가체육지도위원회(체육지도위)는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집권 2년차였던 2012년 11월 신설됐다. 국무위원회(당시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신설된 체육지도위는 국가스포츠 발전을 통한 내부 결속을 꾀하고자 하는 김정은 및 당 최고지도부의 의지가 적극 반영된 결과였다.
체육지도위 초대 위원장은 당시 최고 실세였던 고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었고, 제2대 위원장은 현 실세인 최룡해였다. 게다가 명예위원장은 김정은이 겸임했다.
전임 인사들을 봐서도 알겠지만, 체육지도위의 위상은 기존 내각의 체육성 그 이상이며 다른 권력기구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명실상부한 북한 체육계 최고 권력기구라 할 수 있다.
이런 자리를 최휘가 물려받았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체육지도위의 수장을 맡고 있는 최휘의 기존 직책은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사실 북한에선 최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인 최재하 전 내각 건설건재상이다. 최휘의 탄탄대로 행보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대다수 다른 유력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가문적 배경이 크다.
아버지 최재하는 사실상 북한의 전후 복구 1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일본 패망 직후 파괴된 수풍발전소를 재생하고, 한국전쟁 시기 군수부문의 전력을 보장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당시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김일이 그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또한 최재하는 전후 복구 시기 안정적인 주택 공급에도 적잖은 공을 세웠다. 당시 건재건설상으로서 최재하의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최재하의 공로는 북한의 영화 ‘고압선’을 통해 잘 그려졌다. 영화 ‘고압선’ 자체가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최재하는 나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최재하는 지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1958년 10월까지 북한 내각의 건설건재상으로 일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최휘를 비롯한 최재하의 2남 1녀 자녀들 모두 만경대혁명학원과 강반석유자녀학원을 다녔다. 게다가 최재하의 집은 김일성 관저와 지근거리에 위치해 두 가문 자녀들은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한다. 참고로 최휘의 남동생인 최연은 평양외대 졸업 후 군 관련 무역기관과 내각 무역성을 거친 실력자로 확인된다.
최휘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 졸업 후 북한 노동당의 청년 외곽조직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사로청 중앙기구의 과장과 과외지도총국장을 역임하며 이력을 쌓았다. 특히 1990년대 최룡해가 사로청(김일성청년동맹) 위원장(제1비서)을 역임했을 때 상당한 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휘를 익히 알고 지내던 복수의 북한 내부관계자에 따르면 최휘는 무엇보다 음악과 예술 등 선전선동 분야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이후 중앙당 총무부 부부장을 거친 최휘는 김정은 집권 초기인 2011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역임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안팎으로 불안했던 김정은의 집권 초기, 내부 결속을 위한 선전선동 분야는 무척 중요했다. 이 과정에서 최휘는 앞서 김정일과 장성택의 눈에 들었던 터라 김정은의 신임까지 톡톡히 받았다고 한다.
물론 최휘도 다른 인사들처럼 수차례 부침이 있었다. 과거 1990년대 사로청 수장이었던 최룡해가 혁명화 조치를 받았을 때 그도 잠시 휘청했다. 더 구체적으로 당시 최룡해와 국장급 이상 대부분의 인물들이 함께 숙청됐을 때도 그는 위기를 극복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기 처신술이 상당히 뛰어났다는 후문이다.
이때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 살아남은 최휘지만, 2015년 12월 큰 사건이었던 중국 모란봉악단 베이징 공연 철수는 그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시련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앞서 관계자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최휘는 중앙 권력에서 순식간에 멀어졌고, 함경남도 당위원회 선전부위원장으로 좌천됐다.
하지만 그의 배경과 그간 공로를 통해 그의 중앙 무대 복귀는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 이듬해 최휘는 제7기 2차 전원회의를 통해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때 그는 당 근로단체 부장 겸 정무국 당 외곽조직 및 체육·보건 담당 부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당 근로단체 사업부는 북한의 체육사업과 보건복지 사업을 총괄하는 정책 컨트롤타워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체육지도위원장으로 선임된 최휘는 현재 방남 가능성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체육지도위 자체가 북한 행정을 총괄하는 국무위원회의 직속기구라는 점 때문이다. 그 무게감만 놓고 본다면, 대표성은 충분하다. 여기에 최휘는 이미 지난 2000년 5월 사로청 재직(당시 청소년 과외 교양지도 총국장) 시절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한 경력도 있다. 다만 최휘가 현재 UN이 제재하는 북한 인사 리스트에 올라와 있다는 점은 걸림돌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최휘가 방남 명단에 포함된다면, 유심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겸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