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미곶 앞바다 전경. ‘상생의 손’ 조형물 위에 앉은 갈매기도 마치 일출을 감상하고 있는 듯하다. | ||
뒤돌아볼 틈도 여력도 없이 달려온 일 년. 어느새 세밑을 관통하여 새 아침이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쳤다. 지친 몸으로 받아들이는 새해 새 아침의 햇살. 속 깊은 바다, 영일만에서 그 빛을 맞았다.
길은 굽이굽이 해안선을 돌아 호미곶으로 향한다. 호미곶은 우리나라 전체 지형을 한 마리 호랑이 형상으로 볼 때, 그 꼬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곶은 해안선에서 만을 감싸 안는 가장자리의 꼭지점을 일컫는 말. 한때 일제가 붙여준 ‘토끼 꼬리’란 의미의 장기곶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곳이다.
영일만 맨 아래쪽에 자리한 이곳은 한반도 남쪽의 최동단,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하루 먼저 호미곶을 찾으면 나그네를 먼저 반기는 것은 바닷가에 홀로 우뚝 선 등대다.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은 하늘에 뜬 초생달과 부딪히며 황홀한 광경을 선사한다.
구한말인 1908년 12월20일 세워진 높이 26.4m의 이 적벽돌 등대는 천정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 조각이 남아 있고 1백8계단을 오르는 길은 철제 주물로 이루어졌다. 이런 건축, 역사,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우리나라 등대로서는 처음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급’ 등대다.
등대 옆에 국내 유일의 등대박물관이 있다. 국내외 등대 유물들이 전시돼 있고, 선박운항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박물관 앞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손모양의 조형물은 2000년 뉴밀레니엄의 해맞이를 앞두고 세워진 ‘상생의 손’. 물가에 하나, 뭍에 하나 두 손바닥을 서로 마주보게 세워 새천년의 평화를 기원하였다.
▲ 매서운 파도에도 아랑곳없이 호미곶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위)과 구룡포 과메기덕장. | ||
날선 칼처럼 푸르스름한 여명이 스멀스멀 해변에 번져올 즈음 등대 앞 해맞이광장은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해맞이객들로 가득 찬다. 겨울바다의 매서운 바람이 소매춤을 파고들어 꽤 춥다. 옷을 단단히 여며 맨 사람들은 모두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바다 한가운데서부터 봉숭아물이 들 듯 붉은 빛이 서서히 번지면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와’ 하는 탄성 이후 사람들은 그 어떤 말도 더 꺼내지 못한다. 시선을 뗄 수 없는 붉은 빛. 그 빛에 얼굴들도 벌겋게 물들어 간다. 해가 수평선 위로 올라서기까지 시간은 매우 짧지만, 그 감동의 여운은 길다.
이 시각을 기다렸다는 듯 멀리 바다에서 집어등을 켜고 조업하던 오징어잡이 배들도 햇살에 밀려오듯 속속 포구를 향해 달려온다. 고기잡이 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갈매기들이 끼룩대며 몰려든다. 그 날의 조황은 갈매기들이 더 잘 안다. 갈매기들은 요즘 풍어기를 맞아 살이 오를 대로 올랐다.
영일만은 결코 잠드는 일이 없다. 해가 운제산 밑으로 넘어가면 어룡사의 불빛이 이글거린다. 어룡사란 절 이름이 아니라 지금의 포항제철이 있는 백사장 일대를 일컫는 이름. 포항 제철의 ‘어룡불’, 혹은 ‘어링이불’이라고도 긴 굴뚝이 밤새 ‘쉭쉭’거리며 불길을 내뿜는 모습이 마치 용 한마리가 거친 숨을 내쉬는 듯하다.
환한 불빛으로 인해 1년 내내 잠들지 못하는 바다는 성가신 불길을 꺼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밤새 매섭게 달려든다.
925번 지방도를 타고 칠포에서부터 포항시내 형산교까지 포항제철 제련소의 뜨거운 불길을 감상하면서 달리는 밤길은 최고의 야간드라이브 코스다. 잠시 환호해맞이공원 앞 방파제에서 차를 세워 바닷바람에 머리를 씻는 것도 좋다.
어둠을 모르는 해안선의 풍광은 형산교를 지나 호미곶까지 가는 길이 낫다. 해안선을 따라 난 도로는 내내 구불구불해서 묘미가 있다. 길을 달리다보면 해안 곳곳에 해식애가 보인다. 해식애는 해안에 나타나는 급경사의 절벽. 바닷가 산지에 파랑이 부딪쳐 침식하면서 생긴 급경사면이다. 특히 호미곶 가까이 갈수록 해식애가 많이 보인다. 돌출된 곶 부분은 파도가 더욱 드세다. 파도는 지금도 곶을 깎아 만 쪽으로 그 침식물을 밀어올리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곶과 만의 편차는 좀더 줄어들 것이다.
해돋이의 감흥을 안고 구룡포로 향한다. 길은 간혹 해안선을 벗어나 고갯마루를 넘기도 하지만 금세 다시 바다 앞으로 나선다. 호미곶에서 차로 20분 거리의 큰 항구 구룡포는 만선가를 부르는 오징어배들로 활기가 가득하다.
▲ 호미곶 앞 바다를 찾은 연인. 인적이 드문 겨울바다의 풍경을 갈매기와 파도가 달래준다(위). 형산교에서 호미곶에 이르는 주간 드라이브코스. 달리다 보면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모호해질 만큼 짜릿해진다. | ||
구룡포항 주변에는 오징어덕장이 곳곳에 널려 있다. 오징어 건조는 보통 이틀이면 가능한데, 이곳에서는 하루만 건조시킨 반건조 오징어, 피데기가 인기다. 완전 건조된 오징어에 비해 살이 부드러워 맛이 더 낫다.
하지만 구룡포에서 오징어 피데기보다 더 먼저 시작된 반건조 어류는 바로 과메기다. 과메기는 꽁치를 덕장에 널어 건조시킨 것인데, 한 번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할 정도로 맛이 일품이다. 본래 과메기는 꽁치가 아니라 청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어 과메기는 정월 청어철에나 간혹 볼 수 있을 뿐,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청어는 꽁치에 비해 더 비리고 기름기가 많다.
구룡포여자중고등학교 주변에 몰려 있는 덕장은 요즘 과메기 손질이 한창이다. 이곳 과메기는 전국 어디나 택배도 가능하다. 하루 1백 상자를 판매하고 있다는 노무웅씨(63). 직접 과메기 손질을 보여주는데, 한 마리 다듬는 데 채 10초가 걸리지 않는다. 꽁치 아가미 부분에 칼집을 내어 밑으로 칼을 내리면서 뼈를 발라낸 후, 살에 붙은 내장찌꺼기를 제거하면 끝. 이 때 꼬리지느러미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과메기를 널 때 끈을 꿰는 곳이 바로 꼬리지느러미 부위이기 때문이다.
구룡포까지 왔으면 과메기 맛은 보고 가는 게 예의다. 아무 식당이고 들어가면 과메기를 내준다. 생배추를 먼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김, 미역, 실파, 마늘과 함께 초고추장을 듬뿍 찍은 과메기를 얹어 싸먹으면 된다.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기가 막히다.
처음 과메기를 접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 비린 맛 때문에 덜 마른 몸통부위를 마다하고 완전히 마른 꼬리부분을 주로 찾는다. 그러나 과메기의 진짜 맛은 물컹 씹히는 몸통에 있다. 자꾸 먹다보면 그 맛에 과메기를 다시 찾게 된다. 소주 한잔 곁들인 과메기 맛 하나만으로도 영일만을 찾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IC-경주(4번 국도, 감포 방면)-양북-감포(31번 국도, 포항방면)-구룡포항-호미곶. 대중교통은 포항 시내에서 구룡포행 200, 200-1번 버스 이용, 구룡포 하차 후 대보행 시내버스 이용.
▲과메기: 포항 수협산하 과메기 도매점에 전화하면 전국 어디나 택배로 보내준다. 20마리 한 두름에 통마리 7천원, 배지기 1만원. 택배비는 수신자 부담. 대영식품(054-276-3083) 성원수산(284-9557) 유천상회(276-8595) 용화상사(276-2045) 바다상사(276-0084) 일웅상사(284-2551)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