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동 때도 왁자지껄…서로 생일 챙겨주고 매주 화요일엔 야식파티로 하나 돼”
노아름은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성적의 원동력으로 팀 분위기를 꼽았다. 박정훈 기자
[일요신문] 대한민국 동계 스포츠 최대 인기종목은 단연 쇼트트랙이다. 그동안 숱한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나서 메달을 목에 걸고 영웅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대표팀에 선발됐음에도 동계 올림픽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가 있다. 6명의 선수를 선발해 5명만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도 세계적 축제에 초대받지 못해 절망할 수 있다. 유명 스포츠 선수는 참가가 유력했던 국제대회 엔트리에서 최종 탈락하고 대회기간 내내 술로 밤을 지새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의 ‘6번’ 노아름은 진심으로 함께 훈련하던 동료들을 응원했다. 올림픽에 나선 대표팀 선수들도 그를 기억했다. 대회기간 누구보다 쇼트트랙 대표팀을 응원한 노아름을 만났다.
# 넘어지고도 신기록…“웃음이 끊이지 않는 팀 분위기 덕”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역시 세계 최강의 위용을 자랑했다. 크고 작은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1500m, 3000m 계주 등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따냈다.
노아름은 이 같은 성과의 원동력으로 팀 분위기를 꼽았다. “처음 팀이 소집됐을 때는 어색하기도 했다. 막내 (이)유빈이와 내가 정확히 열 살 차이다. 하지만 훈련을 같이 하다 보니 금방 가까워졌다. 정도 많이 들었다. 8명(훈련 파트너 포함)이 함께하면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새벽 운동을 나갈 때면 졸릴 법도 한데 시끌시끌했다. 그런 좋은 분위기가 넘어지고도 1등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번 2017-2018시즌 대표팀 소집기간은 공교롭게도 8명 중 7명의 생일 기간이 겹쳤다. 이들은 빠지지 않고 서로의 생일을 챙겼다. 선수촌 룸메이트가 상대방의 생일 파티를 기획했다.
“한 번, 두 번 이어지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생일인 당사자도 저녁 때 있을 거라고 알고 있다. 준비하는 다른 친구들도 주인공이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우리는 ‘꾸역꾸역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웃음).”
웃음을 머금고 대회를 치르고 있는 대표팀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분히 준비가 되는 것으로 보였던 대표팀은 심석희가 코칭스태프로부터 폭행을 당해 홍역을 앓았다.
노아름은 당시를 떠올리며 “많은 분들이 석희를 주장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실질적으로 딱히 주장이 없었다”며 “팀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던 내가 대표 경력이 짧아서 코치 선생님이 ‘네가 주장을 맡기가 버거우면 주장 없이 팀을 운영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보통 팀에서 언니들이 주장을 맡기는 하는데 그때 어쩌다 보니 주장이 돼 있더라. 석희가 가장 주목받는 선수였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1500m에서 넘어져서 탈락하는 걸 보며 더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다음 경기에서 좋은 결과로 보답받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은 대회에 나서지 못했지만 노아름은 진심으로 동료들을 응원했다. 수차례 소셜미디어에도 응원 글을 남겼다. 동료들도 훈련 파트너였던 이수연, 김지유를 포함해 함께 찍은 사진을 남기며 같은 마음임을 드러냈다. ‘보고싶다’는 동생들의 연락도 잦았다. 그는 “동생들을 직접 응원하려고 1500m 결승이 있는 17일과 계주 결승이 열리는 20일에 경기장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들. 사진=노아름 인스타그램
# 간절했던 대표팀
노아름에게 국가대표는 간절함의 대상이었다. 2017-2018시즌 성인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노아름은 주니어 시절 한국 쇼트트랙을 이끌 차세대 주자로 평가 받았다. 고교 시절이던 2008년과 2009년 세계 주니어 쇼트트랙 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성인무대에서 활약은 정해진 수순인 듯했다. 노아름 스스로도 “그때가 몸이 가장 좋았고 자신감도 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불운이 찾아왔다. 밴쿠버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10여 일 앞두고 부상을 당했다. “중요한 선발전이어서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다. 그날 여자 선수들은 1시간만 타고 남자 훈련이 이어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혼자 남자 훈련에도 합류했다. 스피드가 빨라 남성 선수들 뒤에서 따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내가 곧잘 따라가니 선생님이 아웃코스로 추월을 하라고 하시더라. 그러다 앞서가던 오빠와 엉켜 넘어지면서 스케이트 날에 허벅지를 찍혔다. 피부와 근육 모두가 찢어졌다. 다른 팀에는 부상을 비밀로 하고 선발전에 나갔는데 두려움과 긴장감에 나 자신을 못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2010년 밴쿠버 올림픽 출전이 무산됐다. 선수생활을 시작하고 부모님이 사준 휴대전화 뒷번호가 아직도 ‘2010’일 정도로 그는 밴쿠버가 간절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밴쿠버 올림픽은 이승훈이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전향해 성적을 거둔 대회다. 노아름도 그처럼 전향 제안을 받았다. 노아름은 “쇼트트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전향을 한다면 (박)승희처럼 성공을 거두고 넘어가고 싶다. 너무 멋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밴쿠버만을 보며 달려왔던 노아름은 실의에 빠졌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며 슬럼프까지 겪었다. 심리적으로도 불안했고 몸관리도 안됐다. 자연스레 운동에 대한 열정도 떨어졌다. 노아름 스스로도 대학 시절을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았다. 자연스레 졸업 시기에 열린 2014 소치 올림픽에도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노아름은 실업팀에 진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각종 대회에서 다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번번이 대표 선발전에는 탈락했다. 선발전만 되면 이상하게 몸이 얼어붙었다. 너무 간절해서 과도하게 긴장했다. 오히려 국제 대회는 마음이 편했다.
첫 성인 대표팀은 2016-2017시즌 차순위 선수 자격으로 처음 뽑혔다. 기존 대표팀이 아시안게임 준비로 월드컵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출전한 대회에서 메달을 목에 걸었다. ‘쇼트트랙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2017-2018시즌에는 꿈에도 그리던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하지만 그가 받아든 성적은 6위. 월드컵 등에만 참가하고 올림픽에는 나서지 못하는 순위다. 포인트를 집계하는 선발전에서 5위 선수와 포인트가 같았다. 기록에서 단 0.01초가 늦었을 뿐이다.
“이미 그때 올림픽에 못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올림픽이 다가와도 덤덤했다. 지금보다 더 힘든 일도 겪었다. 진천 선수촌에서 다른 선수들이 강릉으로 떠나고 나는 소속팀으로 돌아올 때도 괜찮았다. 다만 (김)예진이가 소셜미디어에 ‘꿈만 같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게 마음에 박히더라. ‘좋겠다, 부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웃음).”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준 이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함께 운동을 해온 밴쿠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은별이다. 노아름은 “은별이가 팀으로 돌아온 나에게 직접적 위로보다는 웃게 해주려고 했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일 것 같다. 왜냐면 은별이가 소치 때 ‘6번’이었기 때문이다”라며 웃었다.
노아름은 “몸이 허락하는 한 오랫동안 즐겁게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고 말했다. 박정훈 기자
6번으로 대표팀에 들어갔지만 매순간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강훈련에 지칠 때도 있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한번은 태릉에서 새벽훈련을 5시 20분에 나가는데 그날따라 너무 하기 싫더라. 코치 선생님께 몸이 안 좋아서 빠진다고 할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러닝하기 전에 링크장을 바라보며 ‘내가 여기를 얼마나 들어오고 싶었는데… 배가 불렀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며 웃었다.
이전까지 몇 번의 좌절을 경험했던 노아름은 대표팀에서 초심을 떠올렸다. 그는 ‘다들 여기에 들어오고 싶어 할 텐데, 여기에 오고 싶어서 열심히 하는 사람 투성일 텐데’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 올림픽 이후
다수의 빙상 선수들이 이어지는 고된 훈련에 20대 후반이면 스케이트를 벗는다. 1991년생인 노아름은 올해 한국 나이로 28세다. 당장 선수생활을 그만둬도 쇼트트랙에선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 그와의 만남에서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에게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목표는 베이징(웃음)? 그냥 막연한 목표로 두고 싶다. 내 몸이 허락한다면 그때도 도전을 해보고 싶다. 10년 전이었으면 이런 얘기 안했을 거다. 힘든 시기를 보냈고 지금은 재밌게 운동하고 있다. 밴쿠버 때 올림픽을 눈앞에서 놓쳤다. 그 이후 운동이 너무 하기 싫었다. 평창도 아쉽게 못 갔지만 지금 기분은 다르다. 앞으로 즐겁게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먹으려고 운동한다” 배달음식 덕후들 노아름은 대표팀 훈련 기간 즐거웠던 기억으로 ‘배달음식’을 꼽았다. 그는 “선수들이 다들 먹는 걸 좋아한다. 다른 선수들이 인터뷰한 것을 보면 ‘먹으려고 버틴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화요일 오후가 되면 동생들이 메신저로 ‘시켜먹자’고 제안을 한다. 그런 낙으로 힘든 훈련을 버틴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웃음).” 계산은 철저히 ‘더치페이’다. 경력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받는 훈련 수당으로 음식 값을 지불한다. 후식으로 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는 한 명이 사기도 한다. [상] |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맏언니의 응원 ‘6번 선수’ 노아름은 비록 대회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밖에서 쇼트트랙 대표팀을 지켜보며 누구보다 간절히 응원을 보냈다. 그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대표팀에 대해 “생각만 해도 마음이 벅차서 무슨 말을 해줘야할지 잘 모르겠다”면서도 선수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3000m 계주 금메달의 결정적 역할을 한 김아랑에게 “아랑이가 지금 팀에서 가장 언니다. 계주도 하고 개인전도 해야 한다. 부상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다. 마음을 비우고 준비한 만큼 좋은 결과 나오고 있으니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심석희에 대해서는 “여태 너무 수고 많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다들 아시다시피 안 좋은 일도 겪었다. 팀에서 제일 유명한 선수고 제일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다. 그만큼 부담도 있을 텐데 잘 견뎌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민정 이름이 나오자 노아름은 “강하다”는 말로 입을 뗐다. “힘든 일이 있어서 위로해 주려고 하면 ‘괜찮아요. 저는 지금 이 상황도 즐거워요’라며 웃는 선수다. 너무 강해서 오히려 부러질까 걱정도 했는데 잘 이겨내는 걸 볼 때마다 기특하다. 500m에서 실격됐을 때도 걱정스런 마음에 문자를 했더니 나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하더라. 이미 최고의 선수니까 본인답게 했으면 한다”고 격려했다. 계주에 나서 금메달을 함께 목에 건 김예진과 이유빈에 대해서는 “처음 나서는 큰 대회라 긴장했을 텐데 이겨내 줘서 고맙다. 빡빡한 일정에 ‘힘들다’고 연락도 왔는데 잘 해냈다. 너무 칭찬해주고 싶다. 이 친구들 덕분에 5명이 모여서 강한 팀이 됐다. 5명이 함께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은 누가 뭐래도 원팀(One-Team)이었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