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반 물 반… 여름이 없는 ‘무릉도원’
▲ 살둔산장 근처 문암천 계곡. | ||
휴가철 여행기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 중 하나다. 동해의 푸른 바다, 남해의 누구나 다 아는 아름다운 섬을 두고서, 굳이 오지에서의 불편한 하룻밤이나 두메산골 속 청청계곡, 혹은 고즈넉한 어떤 장소를 추천해달라고 말한다. 지금 소개하는 강원도 미산계곡 역시 기가 막힌 절경이라거나 압도적일 만큼 멋진 장소는 아니다. 대신 자연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산이 반, 물이 반인 곳. 산촌의 넉넉함과 순수함이 남아 있어 더 특별하게 와 닿는 곳이다.
아침저녁 물안개로 자욱한 강원도 계곡에서는 ‘열대야’를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비가 내리는 것처럼 밤새 ‘촤르르 촤르르~, 쏴아 쏴아~’ 폭포수 소리를 낸다. 밤새 춤을 추듯, 노래를 하듯 쉼 없이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그렇게 더위를 몰고 가버린다. 그것이 미산의 계곡이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에 있는 미산계곡은 내린천 상류에 해당되는 청정지역이다. 가고 싶은, 그러나 큰 맘 먹고 찾아가야 하는 피서지 중에 하나다.
계곡 주위로는 주목·가문비나무, 전나무 등 숲이 우거져 있고 쏘가리·어름치·쏘가리·꺽지 등 일급수에서 볼 수 있는 어종들이 산다. 게다가 온전하게 숨어 있는 해발 1천m의 아름다운 고산준령들-방태산, 개인산, 깃대봉, 수리봉 등-이 미산계곡을 에두르고 있어 피서만큼이나 경치 구경도 만족스럽다.
미산계곡이라 하면 대략 방내천과 내린천이 만나는 상남 삼거리 아래 계곡부터 상류 생둔(율전리)까지 10여km 구간을 일컫는다. 전 구간이 개인산 자락을 따라서 흐르고 있다. 상남면에서 생둔까지 깔끔하게 포장된 446번 지방도로는 산, 하늘, 계곡이 어우러지는 강변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다.
계곡을 따라 형성된 미산마을은 마을 이름을 아름다울 미(美), 뫼 산(山) 자를 썼을 만큼 수려한 산이 많은 곳이다. 마을을 휘감고 있는 오봉(다섯 개의 봉우리)으로는 숫돌봉, 치석봉, 구룡덕봉, 주억봉, 깃대봉 등이 있고, 계곡 중간 중간 펜션과 민박집들도 들어섰다. 몇 년 전에 비하면 정겨운 산촌의 모습 대신 깨끗한 휴양지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 .‘고로쇠마을’ 미산계곡은 1급수에만 사는 어름치 쏘가리 꺽지가 있는 청정지역이다. 이곳에서 영화처럼 폼나게 플라이 낚시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 ||
기왕이면 민박집의 주인장과 둘러앉아 미산계곡, 개인약수, 살둔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 플라이 낚시나, 물놀이도 민박집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가능하다.
그 외 미산1리에는 산촌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휴양관과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황토찜질방, 토종 먹거리를 위한 매운탕, 손두부 등의 식당도 눈에 띈다. 미산계곡에서 56번 국도를 이용하면 인근 양양, 속초 등 동해바다로의 접근도 쉽다.
미산1리에서는 개인약수터 가는 길도 지척이다. 위장이나 피부병에 큰 효과가 있는 개인약수 때문에 약수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곳. 그러나 약수터 초입인 개인산장까지 길이 험하고 불편해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개인산장에서 약수터까지 도보로 약 1시간 거리. 대신 산속 깊숙이 숨겨져 있기에 ‘약수’의 효능 자체는 믿을 만하다. 미산계곡에 왔다면 새벽시간을 이용해 개인약수까지라도 꼭 한번 다녀오기를 권하고 싶다. 가족 등산코스로도 그만이다.
얼마 전에 마침 개인약수터 초입까지 포장공사가 끝이 났다. 사람들은 ‘교통은 편리해졌으나, 개인산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걱정하는 소리도 높다. 강원도의 청정 오지로 또는 물, 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 이름난 삼둔 사가리(살둔·월둔·달둔:홍천군 내면),(아침가리·연가리·적가리·명지가리:인제군 기린면)가 모두 개인산 자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인이 정말 살고 싶은 1백대 집’에 꼽힌 살둔산장(위). 지금은 빈집이지만 고즈넉한 운치만은 여전하다. 물 속 조약돌이 투명하게 비치는 미산계곡(아래).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어우러져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 ||
산장 이외에 집이 한두 채 늘어난 것을 제외하곤 여전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시원한 도로가 나 있지만 지나다니는 차는 손으로 꼽을 정도. 대신, 오지로 불리던 그곳에 래프팅 업체가 들어와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살둔산장은 텅 비어 있었다. 넉넉하게 맞이해주던 주인은 간데 없고 살림도 없었다. 단지 구경꾼만 있을 뿐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오가는 등산객들의 넉넉한 쉼터가 되어주던 살둔의 명물이 ‘귀곡산장’이 될 처지에 놓였다고나 할까.
오랜만에 찾아온 등산객들이 헛걸음을 하고 돌아갔고, 산장과 주인에 대한 근거 없는 악소문만 무성했다. 마을 사람들이 주인이 바뀔 거라고 귀띔해준다. 땅과 건물의 주인이 달라서 생긴 ‘소유권 분쟁’이 지금으로는 가장 유력한 이유란다. 몇 달 내 수리를 한 뒤에 새 주인이 들어올 거라지만, 서운함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빈집이지만 살둔산장 내부는 시원하고 깨끗했다.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로 쌓고 그 사이에 황토를 채운 귀틀집 살둔산장은 월정사를 지은 도편수가 지었다고 알려지면서 더욱 관심을 모았던 곳.
사찰식으로 올린 2층 다락방도 특이하다. 주인장의 손때가 묻은 계단 손잡이가 정다웠고, 단풍잎 창호지도 그대로였다. 등산객들이 좋아하던 2층의 ‘침풍루’(枕風樓: 바람을 베개 삼는다는 뜻)도 살짝 들여다봤다. 창문 너머로는 사람의 키만큼 자란 오이밭이 메밀밭의 풍경처럼 펼쳐졌다.
아직 주인장의 온기가 남아 있는 살둔산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달콤한 추억과 씁쓸한 뒷모습을 남기고 말았다. 자연 속에 은둔하고자 들어왔던 주인장이 다시 더 깊은 오지로 숨고, 오지였던 살둔은 이제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없지만 살둔산장 뒤쪽 솔숲이 오토캠핑 장소로는 그만이다. 평평한 모래둔덕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원시 그대로의 문암천 계곡이 흘러가고 있다. 1백여m 인근에 살둔 청소년수련원과 작은 먹거리 장소가 있어서 적막함을 피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