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숲길 열리면 마음도 ‘활짝’
▲ 진악산 자락 보석사. 푸른 가을하늘을 향해 웃는 코스모스가 먼저 알고 손님을 반긴다. | ||
고향에서 가까운 숲길 산책은 어떨까. 함양의 상림숲이나 울진의 소광리 소나무숲, 담양의 메타쉐콰이어 길 등 전국적으로 이름난, 아름다운 숲은 많다. 가봤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녹록치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연휴동안 내 고장 가까이에서 아름다운 숲길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파트 공원길일 수도 있고 정겨운 초등학교 뒷산이 될 수도 있다. 모처럼 모인 가족과 함께 느리게, 그리고 행복하게 걸어보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최근 한 회사의 광고에 쓰인 문구를 기억하는가? 상을 당한 여인을 위로하며 숲길을 걷던 남자배우 한석규의 멘트다. 미안하게도 광고의 주목적인 상품은 쉽게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남자배우의 따뜻한 위로의 말과 그들이 걷던 아름다운 길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향나무 길이야? 아님 전나무숲길이야?’ 물어오는 사람도 있고, 기어코 ‘걸어보겠노라’며 길을 떠나는 사람도 생겼다. 그 길이 바로 충남 금산군의 ‘보석사’ 숲길이다.
이름도 특별한 보석사는 금산읍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진악산(732m) 기슭에 위치한 아담한 절이다. 사찰 인근에는 효자 강 처사가 산신령에게 인삼을 처음으로 받았다는 개삼터도 있다. 조그마한 사찰이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보석사는 신라시대의 고찰로 헌강왕 12년(866년)에 창건한 역사 깊은 절이다. 그 옛날에는 한국 불교 31본산의 하나였고 전라북도 불교의 이사중추기관이었을 만큼 이름 난 사찰이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의 앞산 중턱에서 금을 캐내 불상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날 것 같은 보석사 그곳을 보석처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절 입구의 아름드리 숲길이다. 아주 아주 오래전 길 아닌 길이었을 그곳에 한 사람이 지나가고, 또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천년이 넘게 닦아져온 길.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보석사의 아름다운 숲길을 만들어 놓았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대웅전(위), 보석사 일주문. | ||
보석사의 전나무 숲길은 약 2백m 내외로 짧은 편이다. 풍광도 내소사 전나무 숲길에 비하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내소사가 하늘 향해 치솟은 전나무 행렬이 멀리서도 아름다운 곳이라면, 보석사의 숲길은 좀 더 원초적인 풍경으로 가까이 다가서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예를 들면, 보석사는 걸을 때 느껴지는 고목들의 묵은 전나무향과 여유롭게 오가는 야생 동물, 그리고 듬성듬성 자란 잡초 위를 밟는 포근함이 어울려 대자연의 품에서 유유자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큰 기대를 하고 간다면 외양에서부터 실망할지도 모른다. 천년의 세월을 비켜가지는 못했던지, 숲길 중간중간에는 고사목이 보이고, 끝끝내 일어서지 못하는 부러진 나무들도 눈에 띈다.
풍경이 끝내주게 멋있다거나 대충 찍어도 그림이 되는 곳은 더 더욱 아니다. 다만 보석사 길은 고향집처럼 다듬지 않은 매력, 푸근함이 남아 있다. 또 보는 풍경이 아니라 ‘품을 수 있는 풍경’이라는 점에서 마음을 끄는 곳이다. 비어 있을 때 보다, 누군가가 함께 걸어갈 때 가장 아름다운 길로 완성이 되는 곳이기에 반드시 좋은 사람과 걷고 싶은 길이다.
“이 길로 걸어가도 되죠? 여기 걸어 보려고 멀리서 왔는데….”
서울에서 왔다는 한 쌍의 연인은 일주문을 지나 두 갈래로 갈려진 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했다. 널찍한 왼쪽 길은 주로 등산객들이 이용하고, 왼쪽에 비해 폭이 좁고 나무들의 간격이 일정한 오른쪽 길은 연인이나 부부들이 걷는 경우가 많다. 오래된 길로 들어선 그들이 행복한 웃음소리를 낸다.
▲ CF에 등장해 유명해진 금산 보석사길(위)과 천년 은행나무. | ||
은행나무 정면의 다리-‘위험! 건너지마시오’라고 적힌-를 건너 몇 계단 올라서면 보석사의 대웅전과 대면한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다. 맞배지붕으로 단순미를 강조한 대웅전과 문화재로 지정된 의선각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가람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더 좋다. 값비싼 자재를 들여 새로 짓거나 보수하는 절들은 수없이 많다. 이곳은 그런 혜택조차 누리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지만, 덕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천년고찰의 묵직한 기운을 느끼고 돌아간다.
보석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의 거처로도 의미가 있다. 그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많은 전적을 세웠고 왜군과의 금산싸움에서 조헌을 비롯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순절해 이름을 남겼다. 그가 머물렀던 임진각을 비롯해 대웅전의 왼쪽으로는 그를 위해 제를 올리는 기허당(영규대사의 호)이 자리 잡고 있다. 기허당을 지나면 산신각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있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담장과 보석사 풍경 또한 일품이다.
보석사의 2백m 전나무숲길이 가을 산책으로 짧게 느껴진다면, 은행나무를 지나 등산로를 걸어도 좋겠다. 2~3시간 코스로 운동화를 신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무난하다. 금산읍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적벽강까지 둘러본다면 여유로운 하루 휴가의 완벽한 마무리가 된다. 적벽강 주변에는 ‘팜스테이’(farmstay) 마을이 있어 민박할 곳이 많다.
여행 안내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비룡분기점-대전·통영간 고속도로-금산IC(3시간 소요)-금산읍에서 795번 지방도 이용(진안 방면)-보석사
★문의: 금산군 문화관광과 041-750-2225 www.geumsan.go.kr
★먹거리: 향토음식으로는 어죽, 민물매운탕, 인삼삼계탕 등이 있다. 개삼터 관광농원은 인삼삼계탕, 추부면 마전리는 추어탕, 적벽강 부근의 부리면 수통리는 민물매운탕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