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얼굴 대하니 내 마음도 보이네
▲ 운주사 마당에 놓여 있는 돌조각상. 부처의 얼굴인지 도깨비의 얼굴인지 보는 마음 나름일 듯. | ||
‘운주’(雲住), 구름이 머무는 이곳에는 수많은 부처가 살아 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표정이 있듯 부처들도 저마다의 품새가 있고 표정이 있다. 염화미소의 부처가 있는가 하면 무뚝뚝한 부처도 있고, 화난 듯 입꼬리가 내려간 부처도 있다. 석불의 표정은 깨달은 부처가 아니라 깨닫는 과정의 중생을 닮았고 그 얼굴 중 하나는 ‘정말로 나를 닮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운주사로 가는 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된다.
치장 따위는 사치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 운주사는 있는 그대로 제 몸을 내어 보인다. 굳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 수많은 불상과 탑들은 이끼가 끼면 낀 대로 부스러지면 부스러지는 대로 보수하거나 가꾸기보다 자연과 더불어 성장하고 또 늙어간다.
예부터 ‘천불천탑’으로 이름이 알려진 운주사는 그러나 현재 80여 기의 석불과 17기의 석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자체로도 다른 어떤 도량에 비해 많은 수의 석조물들이지만 ‘전설’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숫자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나 1632년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에 석불과 석탑이 1천 개씩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그 많던 불상과 석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정유재란과 갖은 재난으로 운주사의 석조물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부서지고, 훔쳐가고 심지어 광복 후에는 인근 농가의 주춧돌로 쓰이기도 했다.
천불천탑을 만든 이는 신라 말 실재했던 도선국사라고 하는데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누가 언제 어떻게 운주사를 창건하고 천불천탑을 만들었는지 학술적으로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만큼 운주사는 비밀에 싸여 있다.
어쨌든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세상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운주사에 하루 동안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불상을 만들었는데, 그 마지막이 와불이었다고 한다. 조각이 끝난 채 누워있는 불상만 일으키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와 끝내 운주사는 미완의 도량으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와불이 일어선다면 태평성대가 올까. 전설을 따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전설의 한복판에 있으며 전설이 살아 숨쉰다는 것을 느낀다. 또한 와불이 기적처럼 일어서주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운주사의 전설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고, 또한 ‘진행형’이기도 하다.
▲ 천불천탑의 마지막 작품인 와불. 도선국사가 이 와불을 일으키지 못해 태평성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위). 마당바위 위에 앉혀진 7층석탑. 바위 위에 홈을 파서 탑을 올렸다(아래). | ||
석불은 촌스럽고, 석탑은 어린아이 장난 같다. 그러나 그게 운주사의 매력이다. 촌스럽고 유치함의 극치. 정형의 틀이 무너진 파격미. 이것이야 말로 서민들의 삶과 유리되지 않았던 당시의 불교를 말해주는 증거물일 것이다. 귀족들을 위한 ‘그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서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처’, 운주사가 펼치고자 했던 광명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구층석탑부터 오른쪽 바위에 기댄 다섯 개의 석불까지 처음 운주사를 찾은 이들은 당혹스러워할 만도 하다. 부처인지 미륵인지, 장승인지 모를 석불과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 돌을 괴어 놓은 석탑, 그리고 ‘○×◇’ 등 희한한 문양…. 역사책 어디를 봐도 이런 불교 석조물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노천박물관처럼 운주사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며 긴장을 풀고 쉬어가라고 권한다. ‘이곳은 딱딱한 절이 아니다’, ‘그저 당신이 쉬었다 가는 공원일 뿐이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묘한 동질감, 위엄을 포기한 편안함 속에서 나그네는 평화를 얻는다.
석불과 석탑들은 운주사 내 이곳저곳 아무 데나 널려 있다. 산 중턱에 있는가 하면 큰 바위를 떠받치듯 머리에 이고 있기도 하다. 석불 앞에는 현세의 사람들이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이 보인다. 이 돌탑은 석불과 ‘등가물’(같은 가치의 물건)이다. 현세구복의 목적으로 볼 때 부처와 돌탑은 운주사에서 만큼은 동일하다.
운주사의 부처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한없이 자비로운 부처에서부터 뾰로통한 부처, 들여다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부처의 얼굴은 바뀐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한 자만이 부처를 안고 돌아간다. 내 얼굴을 찾는 자만이 운주사의 부처가 된다.
운주사 경내를 조망하기에는 공사바위가 제격이다. 공사바위는 운주사 천불천탑 건립을 지휘·감독했던 도선국사가 앉아 있었다는 곳. 가을이 포근히 내려앉은 운주사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공사바위 오른쪽 산기슭에는 ‘전설의 주인공’인 2기의 와불이 누워 있다. 사실 와불은 일으켜 세우기도 어려워 보일 만큼 어마어마하게 크다. 길이가 10m를 훌쩍 넘는다. 이 와불처럼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 있는 부처는 전 세계에서 이 곳밖에 없다. 와불 오른쪽 밑으로는 북두칠성을 닮은 칠성바위가 있다. 북두칠성은 민간신앙에서 농사의 풍요와 생명을 관장하고, 죽은 영혼이 돌아가는 별. 운주사가 민초들의 꿈을 담은 도장이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 아닐까.
운주사 여행길에 정형화되다시피 한 화순 고인돌 군락이나 천태산 등을 둘러보기보다 조금 더 발품을 팔아 옹성산으로 가보길 권한다. 이 산은 화순 사람들조차도 잘 모를 만큼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은 산이다. 얼마 전까지 군부대 유격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다.
옹성산은 멀리서 보면 꼭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다. 산허리쯤부터 정상까지 바위로만 이뤄졌는데 그 모양이 참 희한하다.
옹성산은 높이가 572.9m로 그다지 높지 않아 등반이라 칭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말을 붙이자면 트래킹이라고 해야 할까. 슬근슬근 걸어 오르기에 무리가 없는 길이다.
▲ (시계방향으로) 돌부처들은 벽에 기대어 있거나 누워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마치 항아리를 뒤엎어 놓은 듯한 모양의 옹성산.탑신에는 전통 탑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 등의 문양이 도드라지게 눈에 띈다. | ||
정상에 서면 안성저수지와 모후산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조망이 참 좋다. 하산길이야말로 옹성산의 참맛을 느끼게 하는데 코뿔소를 닮은 쌍문바위와 독아지바위 주변에서 바라보이는 동복댐의 운해가 기가 막히다. 특히 가을의 운해를 최고로 치는데 오전 10시까지는 볼 수 있다. 단 시야가 잡목들에 가려 완벽하지 못하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상 부근에 있는 한 채의 양철지붕집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던 90세 넘은 할머니가 살았는데 현재는 집이 비워진 채로 있다.
옹성산에는 고려 말 축성한 길이 5천4백m에 달하는 산성이 산허리를 감고 있었다고 한다. 산의 생김새와 어울려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던 셈. 그래서인지 이름도 철옹산성이다. 하지만 이 산성은 현재 1백m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적군도 허물지 못한 산성을 자연은 세월로 무너뜨린 것이다.
[여행안내]
★가는 길: 운주사: 광주→너릿재터널→22번, 29번 국도→화순읍→화순중앙병원 사거리에서 우회전→29번 국도→능주→822번 지방도→평리사거리에서 좌회전→817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 운주사 옹성산: 광주에서 국도 제22번을 타고 구암까지 와서 국도 제15호선을 타고 구암삼거리→동복→신성리
★숙박: 운주사 인근에 도곡온천 지구가 있다. 온천은 여행의 피로를 풀기에 그만이다. 도곡온천원탕(061-375-3003) 도곡온천프라자(061-375-8080) 도곡스파랜드(콘도·061-374-7600)
★먹거리: 운주사 근처에는 마땅한 음식점이 없다. 입구에 남도식 추어탕을 하는 용강식당(061-374-0920)이 있다. 도곡온천 주변으로 나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오리솔잎한방찜으로 유명한 오리랑닭이랑(061-374-1211), 한방백숙이 먹을 만한 보리와차이야기(061-375-3008), 장어구이가 맛있는 고동바우(061-375-0237)
★문의: 운주사 http://www.unjusa.org 061-374-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