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도 ‘근심’도 잠시 꺼두세요
▲ 사을기마을 최고의 전망대 홈병대에서 바라본 구미정마을 풍경. | ||
사을기마을에 가려면 구미정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제 아무리 길 찾기 도사라지만 사을기마을이 등록된 내비게이션은 거의 없다.
구미정은 남한강 상류 골지천 절경지에 자리한 자그마한 정자다. 아홉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서 ‘구미’(九美)다. 넓은 반석과 층층이 쌓인 절벽,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푸른 물이 어우러져 이곳의 경치를 완성한다.
특히 골지천은 물이 무척 깨끗하다. 강원도의 많은 다른 곳들이 강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게 현실이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면 산을 깎아 일군 밭의 토사들이 흘러내려 강물을 더럽힌다. 이 때문에 민물고기들도 살지 못하고 강을 떠나고 있다. 하지만 구미정 앞을 흐르는 골지천은 그런 ‘흙의 반란’에 영향을 받지 않아 물이 맑고 고기가 많아 천렵을 하기 좋다.
사을기마을은 골지천 건너편에 있다. 예전에는 구미정에서 사을기마을로 건너가는 출렁다리가 있었다. 그러나 태풍과 수해의 영향으로 3년 전 허물어졌고 지금은 사을기교라는,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지어진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사을기교에서 500m쯤 가면 마을이 나온다. 14가구 20여 명 사는 이 마을은 배추와 옥수수, 고추 등을 경작하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마을 초입의 사슴농장을 지나 길을 따라 가노라니 뽕나무 그늘 밑에서 뙤약볕을 피하고 있는 한 농부가 보인다. 사을기마을 반장인 김진호 씨(56)다. 60~70대 노인들이 대부분인 마을에서 그는 최연소자다. 뽕나무 옆에는 김 씨가 가꾼 작은 연못이 있다. 창포와 연꽃이 연못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연못가로 다가서는데 풀잎에 있던 개구리들이 놀라 연못으로 뛰어든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김 씨가 갑자기 멋진 풍경을 보여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그는 언덕 쪽으로 난 오솔길로 길손을 이끈다. 100m쯤 가자 마구 자란 소나무 몇 그루가 막아선다. 그 사이를 헤쳐 조금 더 들어가니 막다른 절벽이다. 김 씨는 이곳을 ‘홈병대’라 부른다고 했다.
홈병대는 사을기마을 최고의 전망대다. 바로 아래로 골지천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흘러내리고 그 너머로는 구미정과 구미정마을이 보인다. 감탄사가 절로 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절벽 위에서 한참을 머물다 내려오는 길, 김 씨가 차나 한 잔 하자며 방성애산장으로 다시 이끈다.
▲ 남한강 상류 골지천 절경지에 자리한 자그마한 정자, 구미정(위). 맨 아래는 아기자기한 방성애산장. | ||
산장지기 방성애 씨는 13년 전 사을기마을로 들어왔다. 우연찮게 민박을 놓기 시작하면서 7년 전 방 세 개짜리 집을 올렸고, 지난해에는 그 옆에 다시 방 1개짜리를 지었다. 모두 다락이 달린 집이다.
집은 그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고 했다. 낯선 길손의 방문에 갓 찐 옥수수며 감자 따위를 내주는 주인처럼 산장이 참 포근하다.
밖에는 말리려고 널어둔 쑥이 통나무 의자 위에 올려져 있다. 모깃불로 쓸 거냐고 물었더니 방 안에 깔려고 말리고 있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바닥에 깔린 말린 쑥의 향기가 진동을 한다. 그러나 인공적인 향기가 아니라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고, 외려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방 안에는 쑥뿐만 아니라 당귀며 각종 약재들이 걸리거나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담겨 있다.
2층 다락으로 올라가니 씨옥수수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원하는 손님들에게 잠자리로 내준다고도 하는 2층은 지붕 한 쪽이 유리로 덮여 있어서 하늘을 볼 수 있다. 밤에 이곳 다락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야말로 별이 쏟아진다고 한다.
집 구경을 하는데 주인이 시원한 한방냉차를 내놓는다. 국화와 당귀, 솔잎, 마가목 등을 넣어 발효시킨 차다. 달면서도 씁쓸한 맛이 일품이다.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뭘 더 내줄까 고민이라도 하듯 주인은 부엌이며 창고를 들락거린다.
결국 주인이 한 아름 들려준 고추를 들고 나서는데 마침 마실을 왔던 한 할머니가 해미기까지 태워다 달란다. 마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 선뜻 답을 못 하는데 구미정 너머에 있는 마을이란다.
원래 이곳엔 다섯 채의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들 떠나고 노인 부부만 살고 있다. 적적한 생활. 뿔뿔이 흩어진 자식들 대신 키우는 소 두 마리와 개 한 마리가 노부부의 외로움을 달랜다.
툇마루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듣노라니 태워다줘서 고맙다며 할머니가 상을 내온다. 된장국에 잡곡밥, 그리고 반찬이라고는 묵은 김치와 상추가 전부. 그러나 그보다 달고 맛있는 밥을 언제 먹어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도시생활에 찌든 눈으로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생활. 그러나 해미기마을에서는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행 안내
★길잡이: 영동고속국도 진부IC→59번 국도 정선 방면→정선에서 42번 국도 임계 방면→송계교회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사을기다리→사을기마을
★잠자리: 사을기마을-방성애산장033-563-6665), 구미정마을-하늘나리(033-526-1953), 청산벽계(011-413-1832)
★먹거리: 사을기마을 방성애산장에서는 식사를 제공한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잡곡밥, 직접 농사지은 채소, 감자 따위로 한 상을 차려내는데 소박하지만 최고의 밥상이다. 가까운 임계에는 메주와첼리스트(1544-2711)가 있다. 3000여 개의 항아리에서 된장과 간장이 익어가는 곳이다. 된장지짐과 머위쌈밥 등이 맛있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