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소자 처우 개선과 난임시술 건강보험 적용 횟수 제한 철폐 등 2·3위…1년간 4만 8177건 접수
청와대가 국민들의 의견을 들을 준비가 돼 있고, 실제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국민들이 예전과는 달리 쉽게 청와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평이다. 그러나 “청와대가 정부 부처와 지자체를 따돌리고 홀로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일각의 비판은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인기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수석 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 ‘민원 1위’ 반려동물 식용금지
“개·고양이는 반려동물인데 잡아먹는 것을 막아주세요.”
“아기를 갖지 못해 난임시술을 받아야 하는데 건강보험으로 지원하는 횟수에 제한이 있어요. 이 제한을 풀어주세요.”
문재인 정부 출범 1년 동안 청와대로 들어온 민원 가운데 가장 횟수가 많았던 민원들이다. 국민들이 답답해하고, 꼭 고쳐줬으면 하는 민원이 대한민국 행정부 총사령탑 청와대로 잇따라 들어왔다.
5월 10일 청와대가 공개한 ‘민원통계’를 보면 지난 1년간 대통령 비서실로 접수된 민원은 모두 4만 8177건으로 박근혜 정부 출범 1년차(3만 3179건)보다 1만 4998건이나 증가, 45.2%의 증가세를 보였다.
인구가 가장 많은 수도권이 전체 민원의 38%(1만 8305건)를 차지한 가운데 문재인 정부의 지지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영남권이 19.2%(9260건)를 기록, 그 뒤를 이었다. 그 다음이 호남(4877건·10.1%), 충청(3480건·7.2%), 강원(1316건·2.7%), 제주(435건·1%) 등의 순이었다.
국민들이 정책을 제안한 민원은 모두 5551건이었는데 이중 대북정책이 703건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사드 배치(62건), 탈원전 정책 관련(53건), 개헌(50건) 등이었다.
일반 민원의 경우에는 ‘개·고양이 등 반려동물의 식용 반대’ 요청이 1027건으로 가장 많았다. 뒤를 이어 재소자 처우개선 및 인권개선 요청(380건), 난임시술 건강보험 적용횟수 제한 철폐(363건), 6·25 및 월남전 등 참전유공자 인정 및 처우개선(245건) 요청도 높은 빈도를 나타냈다.
# 맞춤형 피드백 사례 화제
충북 충주에 사는 중국동포 A 씨는 지난해 10월 “재외동포 비자로 살고 있는 어머니의 국적회복 허가를 신청하려고 했으나 ‘모친의 호적이 한국에 없어 유전자 검사 감정서가 있어야 한다’는 관계기관의 말을 들었다. 이 감정서가 없어 국적회복 허가 신청서를 못하고 있다”며 답답한 마음을 청와대 민원을 통해 전했다. 청와대는 “유전자 검사 결과서가 필수 제출 서류가 아니다”라고 알려줬다. A 씨는 좀처럼 받기가 힘든 유전자 검사 결과서 획득 고민에서 벗어났다.
전북 정읍에 사는 B 씨는 파산 후 40여 일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해 재기하려고 했으나 보증금 마련이 어려웠다. 그는 보증금 분할 납부의 길만 열어준다면 보금자리를 구해 꼭 재기하고 싶다는 희망을 청와대로 보냈다.
청와대는 LH전북본부, 전주지검, 정읍시청 등과 협의해 임대보증금 377만 5000원 가운데 200만 원을 감액시켜주고 정읍시청으로 하여금 임대보증금 지원을 하도록 했다. B 씨는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게 됐고 “아늑하고 포근한 빌라로 입주하게 됐다”며 청와대에 감사의 편지를 전해왔다.
# 문재인 대통령에 선물 줄 이어
청와대 문턱이 낮아져서일까.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에 보태달라며 현금·물품 등을 보내오는 국민들도 있었다. “아끼고 아낀 쌈짓돈을 보냅니다.” 노숙자센터에서 기거하는 60대 노숙자는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교회 헌금봉투에 1000원짜리 지폐를 넣어 이런 사연과 함께 일반 우편으로 청와대에 보내왔다. 초등학교 3년생 어린이는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응원한다며 해외순방 때 차비로 써달라며 1000원을 꽃봉투에 넣어 보내왔다.
직접 만든 물품을 보내온 사례도 많았다. 한 제주도민은 한라산에서 산속을 뒤져 어렵게 캤다는 자연산 고사리를 보내왔다. “대통령님이 드시고 힘내시라”는 편지와 함께였다. 본인이 갓 출시한 건강음료를 문 대통령에게 보낸다며 제품을 배달시킨 경우도 있었다. 한 장인은 자신이 직접 천연염색하고 바느질한 저고리와 스카프를 대통령 부부를 위해 보내오기도 했다.
물론, 일정액 이상의 물품과 현금 수령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마음밖에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청와대의 입장이다. 청와대 측은 “현금과 식품류는 무조건 반송했고, 직접 만든 수제품 중 가액판단 등의 절차를 거쳐 고액의 제품은 반송하고, 보내신 분들께 감사편지를 발송했다”라고 말했다.
# 소통 강화 긍정적 평가, 대중영합주의 경계 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비슷하지만 두 대통령의 성격은 차이가 있다. 영화 변호인에서 볼 수 있듯이 노 전 대통령은 털털한 성격이지만 불같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남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언변이 워낙 좋아 자신의 주장을 우선적으로 관철시키려 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동료로서 호홉을 맞춰왔던 문 대통령은 남의 말을 먼저 듣고 자신의 판단은 뒤로 하는 성향이다. 혹여 상대가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하거나 상식에 벗어난 얘기를 늘어놓아도 말을 중간에 끊기보다 일단 들어준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수많은 대통령 현장 방문 행사가 열렸지만 일방적으로 대통령의 말만 늘어놓고 행사가 끝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행사 참석자들이 심지어 어린이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한마디씩 하도록 권유하고 문 대통령은 열심히 듣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런 성격처럼 문 대통령은 권력기관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그 목소리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연장선에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홈페이지는 ‘모바일 퍼스트’ 시대에 발맞춰 ‘국민소통 플랫폼’으로 바뀌었다. 온라인 국민청원은 주목받는 공론 창구가 되기도 했다. 국민적 공감이 높은 청원에 대해서는 청와대의 라이브방송 ‘11:50 청와대입니다’ 등을 통해 정부와 청와대가 직접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열린 정부를 향한 청와대의 변화는 좋지만 청와대가 모든 국가 사안에 관여하며 일괄 지휘하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참여정부에 몸담았던 김병준 전 국민대 교수는 올해 초 자유한국당 제2기 혁신위원회 행사에 강연자로 참석해 “국가 권력으로 무엇이든지 하려는 것이 문제다. 시장이나 공동체가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국가가 칼을 들고 나선다”며 문재인 정부가 ‘국가주의’의 폐해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이 자리에서 “대중영합주의도 문제다. 정치는 국민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매일같이 국민이 원하는 것, 여론이 이야기하는 것을 따라가기 급급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청와대·정부가 국민들의 여론을 열심히 듣고 응답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고 따라가기식 인기몰이 정책에 빠진다면 정치 본연의 역할을 잃어버린다는 얘기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