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김지하 시인이 최근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에서 밝힌 말(글머리)이다. 정신적 성장이나 편력의 내면풍경에 중점을 둔 자서전보다, 살아 온 시대와 환경에 더 치중하겠다는 뜻이리라. 다같은 회상이라도 문학인은 자서전을 선호하고 그밖의 인사들은 회고록을 택하는 일반적인 성향에서 일단 비켜선 셈이다.
적절한 입지 선택으로 보인다. 초년에 저항시인으로 우뚝했고, 이제는 생명사상가로 새 경지를 트고 나선, 일찍부터 시대적 부하(負荷)에 앞장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에겐 그런 구분이 애초에 부질없을지도 모른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어느덧 육십이 넘은 자신의 생애를 조근조근 엮은 글투가 그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세 권 분량이 조금도 까마득하지 않다.
특유의 활달하고 골계(滑稽)에 찬 필치와 입심에, 콩트 형식의 짧은 이야기들이 저마다 독립된 꼴을 갖춘 덕일 게다. 기승전결에 마음쓰지 않고 아무 데서나 읽어도 되는 꾸밈새가 개성에 넘친다. 조풍삼, 천승세, 김현, 김기팔, 미치코, 윤배 형님 등의 소제목이 그토록 무수하거늘, 개중에는 가족사의 아픈 대목을 짚은 것도 적지 않다. ‘아버지’는 더구나 이 책을 쓴 직접적 동인과 맞바로 닿아 있다.
“미당(未堂)은 일찍이 그의 ‘자화상’에서 ‘아비는 종이었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이 명백한 한마디가 없이는 나의 회상은 전체적으로 그 회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시인은 이런 술회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검열을 해제하겠노라 다짐했다. 파천황(破天荒)의 글쓰기로 거침새가 없었던 그에게도 그런 금기가 있었다. 하지만 ‘도도하고 콧대 높은 하아얀 귀족’으로 묘사한 외할아버지한테서는 통큰 글쓰기의 한 보기를 전수 받는다. ‘너는 앞으로 글을 쓸 아이’라는 전제 아래 말씀하시더란다.
“사람이 글을 쓰려거든 똑 요렇게 써야 한다. 한 놈이 백두산에서 방귀를 냅다 뀌면 또 한 놈이 한라산에서 ‘어이 쿠려’ 코를 틀어막고, 영광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펄쩍 뛰어 강릉 경포대 앞바다에 쾅 떨어진다. 요렇게!” 다른 글에서 간간이 보았으나 오늘 다시 새롭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고 했던 ‘오적’의 서두가 동시에 떠오른다.
아닌 게 아니라 김 시인의 그 무렵 글발은 하나같이 파겁 파격의 연속이었다. 소설이 좀스러워 대설(大說) <남(南)>을 썼다. 제목마다 희한했던 희곡, <똥딱기 똥딱> <나뽈레옹 꼬냑> <구리 이순신> <금관의 예수> 등으로 장르 파괴를 꾀했다. <황토> <애린> <중심의 괴로움> <화개> 같은 시집으로 사람들의 타는 목마름을 외치고 정갈한 서정을 또 심어 주었다.
김지하- 큰 이름이다. 어떤 부채감마저 느끼게 하는 이름이다. 옥중에서 점지받은 생명의 씨앗은 절절하게 와닿는데 ‘율려(律呂)’ ‘마고(麻姑)’는 많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끊임없이 다양한 차원 변화에 힘쓰겠다는 말이 참 좋다. 이번 회고록에서 그걸 확인한 기쁨과 믿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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