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김지하씨의 <생명학2>를 읽으면서 한참을 들여다봤던 문장이다. 김지하씨의 말대로 육체는 영성의 그물이다. 당연히 모든 육체의 노래는 삶의 노래고 생명의 노래다. 삶이 짓밟히면 노래도 병이 들고, 생명이 일그러지면 노래도 구슬퍼진다.
그는 구슬픈 노래, 쓰라린 노래, 무서운 노래,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러 왔다가 오갈데 없는 불안 속에서 무참하게 죽음을 선택했다. 서른두 살, 인생을 함부로 생각하게 되는 나이가 아니었다. 다르카라는 그 남자, 그는 스리랑카에 있는 가족에게 1백여만원의 월급 중에 70만~80만원을 송금했다. 가족을 위해 사는 일이 자기를 위해 사는 일이 되는 그 문화는 우리에게도 얼마나 익숙한가. 그는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이었다. 그 착한 남자가 그 아름다운 나이에 전철만 다녀야 하는 길로 뛰어들어 스스로 세상과 작별한 것이다. 우리처럼 가족이 정겨운 스리랑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는 자기의 죽음인 양 얼마나 애가 끊어졌을까? 그들을 미치게 한 우리는 ‘무죄’이니 편안해도 되는가?
다르카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작은 회사에서 일했다. 한국에 온 지 8년, 이제 우리 음식이, 우리 문화가, 우리말이 익숙해졌지만, 우리의 법에 의하면 그것은 ‘4년 이상 불법체류’일 뿐이었다. ‘불법체류’는 얼마나 무서운 낙인인가. 17일부터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앞두고 국내에 불법체류한 외국인 노동자 11만 명이 “집단 잠적”에 들어갔단다. 죽음으로써 영원히 잠적해버린 다르카는 그들의 불안과 절망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렇게 좌절되는 것이 두려웠던 한 네팔청년도 지난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모두들 10시간 넘게 일을 해도 불평이 없는 무던한 사람들이었고 월급의 대부분을 고국에 송금했던 알뜰한 젊은이들이었다. 온몸으로 절망을 내비치고 죽음을 노래한 이들이 우리와 함께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벼랑끝 선택으로 스리랑카의 꿈이 무너지고 네팔의 꿈이 깨지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무너지고 깨지는 것은 바로 코리안 드림이라고. 다르카를 고용했던 김재식 사장의 말을 곱씹어볼 만하다.
“다르카는 우리말도 잘하는 유능한 노동자였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런 일을 기피하기 때문에 그가 해준 것인데 왜 그가 죽어야 합니까?”
중국, 네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는 60만 명, 우리 나라를 지키는 군대와 규모가 동일하니까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이들이 지금 영세업의 노동력이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의 영세업은 그나마 무너진다. 우리 실업자도 많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이 피하는 노동시장을 메우는 그들은 우리 노동력과 경쟁관계인 것도 아니다.
나는 고용허가제의 입법취지가 ‘4년 이상 불법체류자 강제 출국’에 있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인권사각지대에 존재함으로써 불법상태로 늘 불안하고 초조했던 그들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