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이날 방송은 프랑스 국가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국가연주가 끝나자 드골 대통령은 ‘나는 1969년 4월 28일 정오로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짤막한 사임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평소에도 `침묵 이상으로 권위를 높이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드골이었기에 사임성명 역시 구구한 변명 한마디도 담지 않았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제’라는 호칭을 따오는 등 동양에서 처음으로 황제제도를 확립했던 진시황은 황제의 2인칭으로 폐하(陛下)를, 1인칭으로 짐(朕)을 쓰게했다.
‘짐’이라는 단어는 원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징후’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 단어를 황제의 1인칭으로 택한 것은 최고 권력자는 백성들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구름 위에 노니는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해야 권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황제가 지배하는 시대도 아니며 지도자가 황금궤짝이나 알에서 신탁(神託)을 받아 태어나는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국민들이 지도자를 뽑는 시대이며 국민들은 자신이 뽑은 지도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거의 매일처럼 신문 방송을 통해 훤하게 꿰뚫어 보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권위주의가 몰락하면서 대통령과 국민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권위주의의 몰락과 함께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권위마저 흔들리고 있다고 걱정한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대통령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자유가 신장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통령이 너무 자주 국민 앞에 나타나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에도 원인이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의 말씀’에는 무게가 실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너무 자주, 너무 많은 말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말씀의 무게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내용을 열마디 스무 마디 하게 되면 ‘큰소리’도 ’잔소리’가 되기 십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며칠 전 방송기자들과 취임 1주년 회견을 했다. 이날의 회견은 3개 공중파 방송으로 전국에 동시 중계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날 대통령 회견방송의 시청률은 한자리 숫자에 머물렀다. 취임직후에 가졌던 몇 차례의 회견 때보다 시청률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씀에 실리는 무게나 거기에 쏠리는 국민의 관심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증거다.
게다가 때로는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할 내용까지도 너무 솔직하게 털어놓는 바람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기도 한다. 불법 대선자금을 둘러 싼 ‘10분의 1’발언이나 아직 입당도 하지 않은 열린우리당에 대한 직설적인 애정표현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는 노 대통령의 평소 성품때문이겠지만 너무 솔직한 발언은 말씀의 무게를 떨어뜨린다. ‘깊은 물은 소리가 없다’는 격언은 대통령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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