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물 따라 걷는 시인들은 걷다가 지치면 탁발을 해서 먹고, 어둠이 내리면 노인정에서, 폐교에서, 그들을 청하는 곳에서 하룻밤을 잔다. 집도 절도 없이 걷고 또 걷는 그 시인들, 그들은 도법 스님이며 수경 스님이다. 이원규 시인이며 박남준 시인이다. 그리고 짬을 내서, 혹은 우연히 그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걷는 사람들이다.
그날 나도 그들과 함께 걸었다. 내가 동행한 곳은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섬진강변, 하동 평사리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처음 알았다. 그들이 걷는 길이 사람을 걷게 만든 길이 아니라 찻길이라는 걸. 지리산 850리에 사람 다니는 길이 없다는 걸.
지리산에 인도가 없다! 민족의 영산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싸구려 문명을 어찌할까. 차를 타고 훅, 지나가는 것으로는 지리산을 느낄 수 없다고 수경 스님이 말한다. “지리산을 걸어봐야 알아요. 왜 지리산을 어머니 품이라고 하는지, 지리산의 절규와 희망이 무엇인지, 왜 영산(靈山)인지…. 지리산에 찻길만 만들지 말고 순례길을 만들어야 해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 말이오. 그래야 한반도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요.”
쌩쌩 지나가는 차들을 비켜 한 줄로 타박타박 걷는 그들을 따라 그 위험하고 딱딱한 시멘트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거지처럼 가난해도 왕처럼 당당한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빈 주머니로 사는 일이 무서움이고 고통인 줄 알았는데 걷고 또 걷는 그들의 온화한 기운이 묻는다. 주머니 채우느라 정신 놓고 살아오지 않았느냐고. 욕심에 눈이 멀어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고.
탁발한다는 것은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사실 사랑할수록 가난해진다. 나 혼자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저 낮은 자리, 그 사랑의 자리, 탁발의 자리에 서있는 도법 스님이 말한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 먼저 평화가 되자고. 그렇게 걸으면서 누구라도 만나는 그들은 복잡한 세상을 향해 단순하게 열려 있다. 슬픔이 있는 곳에 위로를, 분노가 있는 곳에 해원을, 오해가 있는 곳에 이해를 위한 토론을! 살인자도, 강도도, 거지도 포용할 것 같고, 정치인도, 기자도, 교수도 부끄럽게 만들 것 같은 저 온화한 기운 때문에 그날 나는 건조한 시멘트길을 걸으면서도 적어도 마음만은 폭신한 흙길을 걷는 것처럼 시원했다.
탁발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지샌 밤, 마음은 마냥 그들처럼 시인이 되건만 몸은 열에 끓는다. 그렇게 시멘트길을 걷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는 몸, 그렇게 한데잠에 길들여지지 않는 내 몸, 목이 붓고 가래가 생기고 기침이 난다. 왕처럼 가진 게 많아 거지처럼 가난한 몸, 자유의 꿈만 꾸는 자유롭지 않는 몸이 자유롭고 싶어 몸이 단다.
나는 자주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근저에 있는 것은 원초적인 생명의 흔적을 만나고 싶다는 무의식이 아니었을까. 생명은 흐르는 것이고 생명은 만나는 것이다. 만남이 끊기면 감옥이고, 흐름이 끊기면 죽음이다. 인도가 없는 지리산과 공기청정기를 의지해 하루 종일 건물에 갇혀 지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바로 내 몸이 아니었을까.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