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10년 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일제 때 친일말단 관리를 했던 아버지의 이력이 그 아들의 정치적 운명에 치명적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너무나 늦었지만 이제서야 우리가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길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 같다. 까맣게 잊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기억이 푸르게 살아나 아들을 쑤시고 딸을 찌른다. 신기남 의원은 의장직을 사퇴했고, 박근혜 대표는 바람을 타거나 맞바람을 맞고 있으며, 이미경 의원은 불안하게 서 있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사랑 혹은 연민이다. 가난한 아버지든 부유한 아버지든 친일파 아버지든 독립군 아버지든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이다. 자기를 밟고서도 자식이 살아나길 비는 이름, 아버지가 어찌 자식을 죽이는 이름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여당의 지도부에 속한 의원이 연좌제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이 어찌 관계가 있을 거냐고 했던 것이나 또 다른 여당 의원이 신 의장이 사표낼까 겁난다고 했던 말은 이해는 된다. 아버지의 친일 행위로 아들을 심판대 위에 세울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말씀은 지당한데 왜 그 말씀이 지당하게 들리지 않고 정파적으로 들리는가. ‘음모론’까지 제기하는 상황이 왜 그렇게 낯설기만 한가. 바로 이중적 잣대 때문이다. 신기남 의장을 변호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다고 평가한 그이들이 박근혜 대표에 대해서는 “친일파의 딸”이라고, 안된다고 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면 과거사 진상규명이 역사 바로 세우기가 되지 않고 정파적 이해에 따른 싸움이 되고 만다.
36년간이나 식민지배를 받았던 치욕의 나라에서 한번도 역사의 원죄를 드러내고 고백하고 참회하는 절차를 밟지 못했다는 것은 얼마나 아프고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런 치욕을 반복하지 않고 털고 가기 위해서도 지난날의 분명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드러내고 돌아보는 절차가 필요하다.
사실 신기남 의장이 의장직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이력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력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때문이었다. 미국에 간 그는 아버지가 토벌대에서 일한 경력을 떠벌이며 한미동맹과 연결시켰다. ‘나 신기남은 미국에 충성(?)할 수 있는 인물이니 내가 의장으로 있는 한 열린우리당은 걱정 없다’는 사인을 보낸 것인가? 그 결정적인 장면만으로도 그는 지금 주류세력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는 데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국가지도자로서 고뇌가 없어 보이는 그에 대해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신기남 의장이 넘어진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력을 평가하는 그의 시선, 즉, 그 자신 때문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나라에서 부끄러워해야 하고, 이념이 인간을 지배했던 냉전의 상황에서 고뇌해야 할 이력에 대해 그는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이 그저 강한 존재에 빌붙기를 기원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또다시 신기남 의원이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이미경 의원이 넘어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아버지를 모른다고 하지 말고,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 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으니까.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