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
직책을 이르는 호칭이나 새로운 직제를 만드는 일은 현실적으로 조직운영에 필요하기 때문이니 정색을 하고 탓할 일은 아니다. 새로운 제도를 창의적으로 운용하면 직업 전체가 크게 활력을 얻을 수도 있다. 대기자 직제의 신설도 그러한 효과를 얻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몸보다 옷이 지나치게 크거나 상품은 그대로인데 포장만 화려한 경우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중반 전문기자 호칭이 경쟁적으로 도입됐을 때 한 신문의 전문기자들은 자신들의 기사에 그냥 ‘○○○ 기자’로 써주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언론에서 특별한 호칭을 다는 일이 자연스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 기자는 도리어 매우 단순한 기사를 게재하며 전문기자 타이틀을 습관적으로 붙이는 관행이 매우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다.
돌이켜 보면 대기자는 구한말 박은식 선생이나, 신채호 선생 등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기사나 칼럼을 그러한 타이틀을 달고 쓴 게 아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 후배언론인들이 그들의 정신을 기려 그렇게 불렀다고 보는 편이 옳다. 오늘날 대기자나 전문기자는 한편으로는 회사의 홍보전략 방편으로 또 한편으로는 관리보직을 주기 어려운 기자들의 수용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은 기자들의 호칭은 인플레가 되는데 신문과 방송의 신뢰도와 언론인에 대한 존경심은 현격하게 추락하는 역설적인 현실이다. 미국의 전설적 기자들인 제임스 레스턴이나 월터 리프먼은 staff writer, correspondent, 또는 칼럼니스트 정도의 타이틀을 사용했다. 모두 기자, 담당기자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미국신문이 쓰는 가장 높은 칭호라야 선임기자를 뜻하는 senior correspondent 정도다.
기자는 결국 기사로 승부를 해야한다. 특별한 호칭은 내부용으로 쓰면 모를까 지면에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론인 호칭의 인플레 가운데 또 생각해봐야 할 대상으로 1년씩 대학에 출강하는 언론인에게 붙여주는 ‘석좌교수’ 호칭이 있다. 이는 원래 석좌교수가 종신고용의 의미가 있는 용어라는 점과 학문적 업적이 탁월한 학자를 일컫는 점을 고려하면 해당 언론인들에게 명예가 되기는커녕, 크게 누가 될 수도 있다. 또 학생들에게는 개념의 혼란을 심어주기 쉽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에게는 ‘기자’만한 호칭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