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
19세기 미국사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식 생각이다. 월든(Walden)은 그가 도시를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 2년2개월을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생활의 기록이다. 그의 관점으로 보면 사람들은 인생을 거꾸로 산다. 숲에서 살아보니 하루만 일하면 6일을 먹고 살 수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하루를 쉬기 위해 6일을 일한다는 게 월든의 생각 가운데 하나다.
소로우는 자유주의자였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에 영감을 제공한 <시민 불복종>(One Civil Disobedience)은 소로우의 자유주의 선언문이다. 1846년부터 1848년까지 계속된 멕시코 전쟁에 반대해 소로우는 인두세 납부를 거부한다. 그 결과 그는 동네 감옥에 투옥됐다. ‘사람을 부정의하게 감옥에 가두는 정부 아래서는,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장소는 감옥뿐이다.’ 소로우가 감옥에서 나와 쓴 <시민불복종>의 한 구절이다.
소로우의 자유주의는 정부 권력의 침해에 대한 시민적 권리의 표현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시민불복종>의 첫 문장부터 강하게 제시된다.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최고의 정부다. 내가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모토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생각이 좀 더 빠르게, 체계적으로 실현되기를 고대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생각은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가 최고의 정부’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러한 생각도 깊이 신봉한다.’
자못 길게 소로우를 얘기하는 이유는 역시 우리 현실을 비추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어떤 정부인가. 안타깝지만 나는 적게 다스리고자 하는 한국 정부를 떠올릴 수 없다. 70~80년대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폭압적 정부였다. 시민 생활을 시시콜콜 간섭했다. 그런가하면, 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의 정부들은 대체로 무능하거나 비효율적이었다. 1997년 시작된 외환위기는 결국은 정부의 실패를 공인받는 기회였다.
역설적인 현실은 정부의 실패를 수습하는 주도세력이 또한 정부여야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20여년 일관되게 지속된 상황은 정부의 팽창이다. 실패가 심각해도 정부는 커지고 경제를 살려야하니 또 정부기구가 새로 만들어졌다. 중앙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방정부들도 대규모 청사를 앞다투어 지었고, 기초 의원들은 무급봉사를 유급으로, 거기에 보좌관 제도까지 요구하는 상황으로 변해왔다. 이쯤 되면 정부가 시민에 봉사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교과서속 진술일 뿐이다.
안산의 아파트 주민들이 소위 말하는 ‘세금폭탄’에 저항해 납세거부운동을 조직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비대해지는 정부 기능에 대한 시민의 도전이다. 담배세금을 계속 올리고, 소주세도 올리려 한다. 세금을 가지고 사기업인 지역 신문을 지원하는 법을 만들었고, 심지어 망하는 신문의 배달까지도 정부가 해주려다보니 역효과가 소로우식 시민의 저항으로 나타나는 양태다.
정부의 기능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수많은 사람이 정부에 봉사한다. 사람들로서가 아니라 기계의 부품이듯이.’ 다시 <시민불복종>의 한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