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북관대첩비는 해주 정씨, 정문부 장군이 지휘한 부대의 의병들을 기념하기 위해 한반도 북단, 함경북도 길주에 세워졌었던 승전비다. 1592년 임진왜란은 무방비 상태의 조선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전쟁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겼으니 조선에게 왜란은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난리였겠는가. 마침내 임진년(壬辰年) 7월15일, 가등청정은 2만2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함흥으로 진격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태로운 난리 속에서 삶에 연연한다는 것은 구차한 일이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해서 그 아우성을 감당하지 못한 대부분의 수령방백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 몸을 숨겼다. 그러나 삶에 연연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맞서 싸워 공동체의 빛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절망적인 시대일수록 역시 사람이 희망이었던 것이다.
죽을 각오로 의병을 일으켜 한반도의 자존심이 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정문부 장군이었다. 정문부 장군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기처럼 일념인 사람들을 모아 열심히 싸워 육지에서는 처음으로 일본군을 격퇴한다. 정문부와 함께 한 의병의 수가 6천 명이 넘었고, 그 기개로 2만2천여 명의 일본군을 이긴 것이다. 북관대첩비는 정문부 장군이 지휘한 부대의 의병들을 기념하기 위해 함경북도 길주에 세워진 승전비다.
긴 세월, 길주땅에서 함경북도의 호방한 기개의 상징으로 통했던 북관대첩비가 어째서 남의 땅 남의 정신인 야스쿠니 신사에서 발견된 것일까? 어떤 이유로 북관대첩비가, 물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정신이 다른 야스쿠니 신사 한 구석에서 큰돌에 짓눌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던 것일까?
북관대첩비를 강탈해간 것은 일본군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이케다 소장이 북관대첩비를 발견했고 미요시 중장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운반해간 것이다. 그런데 그 강탈의 이유가 궁금하다. 사실 북관대첩비는 우리에게는 승전의 기록이지만 일본에게는 패전의 기록이다. 일본이 그 비를 차라리 부수어 버리지 않고 강탈해 가서 안내판 하나 없이 그저 방치해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여덟 차례나 무릎을 꿇었던 조선의병장의 혼이 담긴 비석으로 무엇을 하려 한 것일까? 글쎄… 그 비석을 큰 돌로 눌러놨던 것으로 봐서 일본을 떠받치고 있던 귀신들에게 조선의병장의 혼을 바치고자 했던 주술은 아니었을까?
백년 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짓눌려 있던 북관대첩비가 돌아온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갔던 통곡의 해에 이 땅을 떠난 북관대첩비, 그 비가 돌아오는 것은 상징적이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돌비석이 아니라 의병장의 기개가 돌아오는 것이니까.
이제 바다를 건너오면 북관대첩비는 남쪽에서 충분히 환영을 받은 후에 원래 자기 자리인 북쪽땅 함경북도 길주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4백 년 전 온몸으로 이 땅을 지켰던 의병장의 마음도 그 길 따라 부활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 길운의 예감 속에 분단극복의 오묘한 기운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는지.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