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철언 당시 정책보좌관은 정계 ‘대선배’인 YS의 극진한 대접에 어리둥절해 했다. 물론 이는 당시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YS 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 ||
3당 합당 과정에서 드러나는 김영삼과 박철언의 특수한 관계. 어쩌면 그것은 그 후에 전개되는 두 사람의 정치적 갈등으로 볼 때 숙명적인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치열하면서도 미묘한 알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비록 그것이 정치적 특수 목적에 의한 결합이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갈등을 안고 출발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일정 기간까지는 밀월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박철언 전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기억이다.
“솔직히 말해 김영삼 총재는 위상으로 볼 때 나하고는 비교도 안될 정치적 대선배이자 인생의 선배다. 따라서 나로서는 깍듯이 모셔야 할 그런 상대인데 이해가 잘 안된 것은 새벽 일찍 상도동이나 또는 밤늦게 대림동 현철이 아파트로 찾아가면 김 총재가 손수 코트를 걸어 주고 차를 대접하면서 극진히 대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내용의 또 다른 진술을 들어 보자. 6공 청와대 Y비서관의 증언이다. “89년 5월 여야간 정치판의 최대 현안은 5공 청산이었다. 중간평가는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동의를 얻어 3월20일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발표가 나갔기 때문에, 여야간의 현안은 5공 청산, 특히 5공 핵심인사들에 대한 처리 문제, 그리고 전두환 최규하 두 전직 대통령의 국회 증언으로 압축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를 상대로 정계개편, 3당 합당을 위한 물밑 교섭을 해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특기할 것은 양 김씨가 다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더욱 호의적이었던 것은 김영삼 총재였는데 박 보좌관이 찾아오면 코트를 받아 걸어 주고 상석을 권했고 손수 차를 타서 대접한 일들이 그런 것이다.”
의문이 제기된다. 만일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때 김영삼 총재의 속마음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을 숨기고 있었기에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을 하고 나온 것인가. 해답을 정계 원로 C옹으로부터 들어 보자.
“그때 YS의 최대 관심사가 뭐였겠나. 그때뿐이 아니지. 고등학교 때부터 마음먹었다는 대통령이다. 자나깨나 여기에다 목표를 세워놓고 전력투구해왔는데 89년 5월 현재 YS의 주변 상황은 절체절명의 위기 국면이었다.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이 터지면서 옳다구나 때는 왔다 싶었는데 아뿔싸 문 목사의 밀입북을 주선한 유원호가 통일민주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없었던 것만도 못한 결과가 돼버린 것이다.
그런 데다가 노태우 대통령하고 김대중 총재 사이에 요사스런 밀담이 오고 가더니만 3월20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 유보 선언이 발표됐다. 아차 싶었다. 까맣게 모르는 사이에 그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버렸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YS가 내던진 반격의 카드가 무엇이었느냐. 4월27일의 동해시 보궐선거다. 여기에서 이기는 것으로 위기 국면에서 탈출하고자 했는데 그만 공화당 후보 매수 사건이 터져 버린 것이다.”
김영삼 총재가 박철언 정책보좌관과 접촉하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인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여기서 색다른 진술을 들어 보자. 89년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 이종찬 전 의원이다.
“그때 나는 중간평가 문제와 관련해서 박철언 정책보좌관하고는 별도의 방향에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접촉이 있었다. 박 보좌관은 이미 알려진 대로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방향에서 김 총재를 설득하기 위해 DJ하고 접촉했지만 나는 반대였다. 중간평가는 반드시 실시한다. 그러나 김 총재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런 방향에서 DJ를 설득하기 위해 접촉한 거다. 그런데 어느 날 김 총재가 엉뚱한 요청을 하고 나온 거다.”
김대중 총재. “나가 이 의원을 위해서 협조할 일이 있으면 협조할 수도 있다. 대신 이 의원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다. 나하고 여권 핵심부 사이에 핫라인을 설치해 달라.”
“구체적인 얘길 듣질 못하고 내 나름대로 짐작을 했다. 아하 이 양반이 뭔가 변화를 추구하고 있구나. 그래서, 여권 핵심부의 어떤 사람을 파트너로 삼을 생각인가, 했더니 김복동하고 자기 사이에 핫라인을 놔달라는 것이었다.” 89년의 상황에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는 여권의 핵심부와 핫라인을 개설코자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핵심 중의 핵심인 박철언 청와대정책 보좌관과 사이에 대화의 창구가 열려 있는 상황에서 이중적으로 또 다른 비상전화망을 가설코자 했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런 데다 의문은 또 있다. 89년 당시 김대중 총재로부터 핫라인 개설을 요청받았던 이종찬 사무총장은, 여권의 핵심부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을 가리키는지 물었다. 그러자 김대중 총재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친인척 김복동 의원을 지명한 것이다.
이종찬 전 의원의 진술이다. “내가 그때 김대중 총재를 만난 것은 중간평가와 관련해서 김 총재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중간평가는 반드시 한다. 대신 김 총재께서도 협조해 주셔야 겠다. 그랬더니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어떤 건가. 여권의 핵심 인사, 가능하다면 김복동씨하고 핫라인을 연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당시 그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복동씨를 만나 김대중 총재의 뜻을 전달했는데 이때 김씨의 대답은 이랬다.
‘이 총장이 알다시피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견제당하고 있는 몸이다. 김대중 총재가 나를 파트너로 삼아봤자, 아무 도움도 안될 테니 누구 다른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데 실패했는데 그 뒤에 보니까 김복동씨가 소장으로 있었던 국제문화전략연구소 이기홍 비서실장하고 연구위원 백성남씨가 주선을 해서 동교동 측하고 간접적인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른바 ‘김대중 대통령, 김복동 부통령’설이었는데 그런 소문이 나올 정도라면 핫라인이 설치됐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 김복동 전 의원 | ||
두 번째의 의문은 여기서 제기된다. 제대로 가동했든 못했든 그때 김대중 총재는 왜 여권의 핵심 인사로 김복동씨를 지목했을까.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6공 청와대 Y비서관의 해답이다.
“첫째는 당시 정가에 나돌았던 소문대로 김복동씨는 호남쪽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여기엔 부인 임금주 여사의 고향이 광주가 돼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영향은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김복동씨가 비록 실세는 아니었지만 여동생이 대통령 영부인이고 매부가 육사 동기로서 대통령이다. 청와대 가족 모임에서 나오는 그의 발언은 역시 무시할 수가 없고 실제로 막강한 영향력으로 작용했다. 힘이 실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총재는 박철언 정책보좌관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친인척과 교감을 갖고 싶었을 것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어쩌면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김복동씨는 노태우 대통령과의 사이가 크게 좋질 않았다. 이것이 호남 사람들에게는 역반응을 일으켰다. 좋은 인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태우와 김복동과의 관계를 알게 하는 일화 하나를 들어 보자. 우선 노태우 대통령은 처남 김복동씨를 싫어했는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얘기다.
“도대체 대통령을 뭘로 보나. 손윗 처남이라캐서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모르겠거든 금진호를 좀 봐. 동서지간이지만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알아서 경제에 대한 발언만 할 뿐 정치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안 해. 그런데 김복동이는 뭐야. 지가 언제부터 정치를 알아서 말끝마다 정치 얘기만 들먹이느냐. 그것도 좀 부드럽게 우회적으로 표현을 하는 거도 아니고 이건 매사에 직설적이고 저돌적이야. 그래 가지고 무신 정치를 안다고…. 공자 앞에서 문자 쓰려고 하느냐 이 말이야.”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배경이 있다. 계속해서 Y비서관의 증언이다. “88년 8월 김복동씨가 미국을 방문해서 워싱턴에서 한국특파원들하고 기자회견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대권에 도전 운운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 말을 전해들은 노태우 대통령은 대노했다. 발언 자체가 그런데다가 88년 8월은 6공 정부가 출발한 지 6개월도 채 안된 시점이었다. 그런 때에 미국에 가서 엉뚱한 말을 하고 나왔으니 화를 낸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당시 영부인 김옥숙 여사가 이런 말로써 오빠에게 경고했다. ‘오라버니 옛날 같으면 3족을 멸할 일입니다. 우리 김씨 가문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그랍니까?’”
일화는 또 있다. 92년 말 대선 과정에서 김복동 의원이 말도 없이 정주영 후보가 이끄는 국민당에 입당키로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노태우 대통령은 또 한번 대노한 것이다. 안기부장을 찾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안기부장이야? 나 대통령이야. 지금부터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서 김복동이가 시방 어데 가 있는지 확인해. 그래 가지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내 앞으로 끌어 와. 이거는 대통령의 명령이라카는 거를 명심해. 이상이야!”
당시 김복동 의원은 경부고속도로 대구 인터체인지에서 안기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아니 체포가 아니라 납치되었다. 그리하여 청와대에서 매부 노 대통령으로부터 집중적인 세뇌를 받았으나 풀려나자 곧바로 국민당에 입당, 정주영 대통령 만들기에 참여해 버렸다. ‘3족을 멸할 일’을 서슴없이 해낸 것이다.
결론은 그렇다. 김대중 총재가 여권 핵심부의 파트너로서 김복동 의원을 지목한 데는 그런 일들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김대중 총재는 3당 합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해시 후보 매수사건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김영삼 총재의 선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김영삼은 언제 합당을 결심하게 됐는가. 89년 당시 3당 합당의 통일민주당측 실무 주역 황병태 정책위의장이다.
“그 부분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는 것이 진실이다. 어째서 그러냐.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김영삼 총재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 시기와 관련해서 누구에게도 말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느냐.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이 김 총재 자신조차도 언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3당 합당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는 엄청난 갈등과 번민을 거듭한 바 있다. 밤잠을 못 이루고 새벽 일찍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만큼 3당 합당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던 것이다. 마치 올 12월 대선의 승자를 알아맞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