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왼쪽)의 명을 받아 정계개편 의 밑그림을 그린 박철언 정책보좌관(오른쪽). 실제 ‘노심’ 과 달리 박철언은 4당 합당의 ‘그랜드 디자인’을 꿈꾸고 있었다. | ||
여론의 향배를 보면 노무현 정부의 새로운 시도와 실험들이 상당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새 정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정책이나 정강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여소야대’의 정치 구도 속에서 과연 새로운 실험들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여소야대의 정국으로는 강력한 정책의 실현이 어렵고 매사에 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결국 정계 개편과 같은 ‘돌파구’가 없는 한 노무현 정권의 개혁 드라이브가 공허한 구호에 그치게 될 공산이 적지 않은 것이다.
2004년 4월의 총선에서 승리해 여소야대 정국을 탈피하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와 민주당의 복안인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내년 총선은 노무현 정권의 ‘중간평가’ 의미가 담겨 있다.
89년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진되던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도 당시의 여권과 야당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진술이다.
“사실 중간평가 문제는 내가 관계 부서에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건의를 해서 보류를 시켰다. 물론 이것은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긴 해도 공약이라는 기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정이 달라지면 유연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노 대통령께 말씀드리면서 일단락을 시켰다.”
이 진술 중에 중요한 대목은 대통령을 설득해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귀결시켰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과 관련된 진술을 들어보자. S대령의 분석이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세상이 다 알다시피 정계개편 및 민정, 민주, 공화의 3당 합당을 위한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밑그림에 따라 막후 협상을 진행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게 되는데 보고는 거의 사후 보고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는 것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그때 그때 지시를 받아서 협상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상 즉, 밑그림에 의거해서 협상을 진행했고 이는 그 정도로 노 대통령의 속마음, 이른바 ‘노심’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자, 그런데 이때 노심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느냐. YS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의 정책 연합이나 당 대 당 합당 얘기가 나오면 그의 반응은 이랬다.”
노태우 대통령의 반응.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지만 과연 그기 가능하겠나. 공연히 우리가 정치 9단 YS에게 놀아나는 게 아니야?”
반면에 DJ 김대중의 평민당과의 합당 얘기가 나오면 반응은 달랐다.
“되기만 한다면 좋겠제.”
‘얼마나 좋겠나’가 아니라 그냥 ‘좋겠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단서는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겠나 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S대령의 진술.
“왜 이처럼 표현이 달랐느냐. 한 마디로 노태우 대통령은 평민당과의 정책 연합이나 합당은 바라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김대중 기피증’이었는데 그렇다면 DJ에 대한 노 대통령의 거부 반응은 애당초 어디서 나왔느냐. 해답은 그렇다. 군이었다. 그리고 당이었다. 즉, 군 내부에 팽배해 있는 DJ 기피증 그리고 민정당 내에 결집돼 있는 김대중에 대한 거부 반응을 두려워한 것이다.”
실제로 노태우 대통령은 평민당과의 합당 얘기가 나오면 단서를 하나 더 붙였다. 혼잣말처럼 되뇌이던 노 대통령의 한마디.
“우리가 평민당하고 합당하면 군에서 가만있겠나. 또 당에서도 쉽게 받아들일라고 하지는 않을 낀데 그때는 우짤기고….”
문제는 박철언 정책보좌관의 정치 철학이었다.
여기서 진술자를 바꿔 6공 청와대 L비서관이다.
“그때 박 보좌관이 정책 연합이나 합당과 관련해서 3단계의 정치 철학을 제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밝혔지만 그 내용은 이랬다. 제1단계 민주화, 제2단계 민족 화합, 그리고 제3단계 통일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제1단계 민주화. 이것은 이미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을 민주화의 구현으로 여겨 이루어졌다고 봤다. 제2단계 민족 화합. 이것이야말로 박철언의 정치철학의 핵인 정계개편 및 3당 합당의 배경이다. 여기서 내각제 개헌을 가미해 왜 정계개편이 필요한가를, 그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박철언의 내각제 주장의 속내를 꿰뚫은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 | ||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결국 민족 화합의 골자는 대체 뭐야?”
“내각제 개헌 아닙니까?”
“내각제 개헌은 나도 알아. 내 말은 민족 화합하고 평민당하고의 합당하고 어떻게 연계가 되느냐 말이야.”
“각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지는 평민당하고의 합당을 주장하고 있는 기 아닙니다.”
“아니야? 아니면 뭐야?”
“4당 합당입니다.”
“4당 합당!”
“우리 민정당을 비롯해서 평민당 민주당 그리고 공화당의 4당이 합당해서 일본의 자민당과 같은 집권 거대 여당을 구성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각제 개헌을 단행해서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도약케 하는 것입니다. 각하.”
“듣고 보니 황당무계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만.”
“각하,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기 어떻게 가능한 일이야.”
“가능합니다. 소외된 호남권을 끌어안으면 됩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끌어안으면 됩니다. 이기 바로 ‘신 TK론’ 아니겠습니까?”
“신 TK론?”
“지금까지는 대구 경북을 연결해서 TK로 불렀습니다. 신 TK는 T가 대구를 가리키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K가 다릅니다. 경북이 아니라 광주, 즉 신 TK는 대구와 광주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대구와 광주의 연합을 상징해서 신 TK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당시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주장했던 신 TK론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가.
박 전 보좌관 자신의 해명이다.
“내가 그때 구상한 정계개편은 그랜드 디자인이었다. 소외된 호남권을 끌어안아서 4당 합당을 이루어 일본의 자민당처럼 보·혁이 공존하는 집권 대여당을 구성해 내각제 개편으로 밀고 나가자는 것이었다. 물론 보·혁 공존이라카지만 그 중에 재야와 같은 색깔에 문제가 있는 인사들은 털어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온 기 바로 신 TK론인데 대구와 광주를 연결해서 대화합을 이루자는 기 나의 정치철학 제2단계 민족 화합의 골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YS의 통일민주당보다는 DJ의 평민당하고의 정책 연합 또는 당 대 당 합당을 밀고 나간 거다.”
그렇다면 박철언의 정치철학 제3단계 통일시대의 개막은 어떤 내용인가. <중앙일보> 오병상 기자의 분석이다.
‘박철언의 정치철학 제3단계. 통일 시대의 개막은 정치판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후계 구도와 직결돼 있다. 통일시대는 곧 3김 중심의 정치 구도를 청산한 통일세대들의 새 시대를 의미한다.
여기에 박철언 자신이 포함돼 있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그가 구상한 내각제 개헌 역시 목표는 수십년간 정치판을 요리해온 3김씨를 밀어내는 데 있었다.
내각제에서는 수상의 임기가 정해져 있질 않으므로 대권 쟁취에 평생의 정치 생명을 걸어온 3김씨로 하여금 단명 총리로서 권력 정상의 맛만 보게 하고 밀어낸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박철언이 5·6공을 통해 동구권 및 대북 밀사 외교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기실 통일 시대에 걸맞는 리더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3당 합당 후 YS가 내각제 개헌에 적극 반대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황태자 박철언의 3김 청산 구도를 꿰뚫어본 데서 나온 경계와 반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 TK론이 실현될 수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6공 정권의 모태인 군부와 김대중 그룹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골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본인이 회고하는 정황은 어땠는가. 먼저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연루자 37명이 남산 지하실에서 육군본부 계엄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되었을 때의 상황을 본인의 진술로 들어보자.
“계엄령 아래에서도 체포되면 즉시 변호사를 세울 수 있다. 법에 나와 있다. 그래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자 마자 변호사를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변호사 이름까지 가르쳐줬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얘기가 달랐다. ‘법상으로는 그렇게 돼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변호사를 세워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런 일은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 검찰부에서도 당했고, 또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도 당했는데 결론은 그랬다. ‘변호사는 세워줄 수 없다.’ 그러다가 군법회의 재판부로 넘어가게 된 단계에서 일면식도 없는, 또 변호 의뢰를 한 일도 없는 변호사 두 사람이 교도소로 찾아와서 도장을 받아갔다. 그리고 나서 누가 면회를 왔다기에 나가봤더니 허경만 변호사가 와서 변호를 맡겠다고 해서 도장을 찍어줬다. 결국 내가 요청한 변호사는 한 사람도 기용되질 못하고 그밖의 사람들이 변호를 맡게 된 거다.”
이 부분에 대해 검찰측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름을 밝히기 거부한, 당시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과의 한 사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37명이 합동수사본부에서 우리 검찰부로 넘어왔을 때 누구도 이 사건을 맡겠다는 검찰관은 없었다. 잘해봤자 본전, 못하면 검찰관 경력에 오점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군대에서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사건을 맡기는 맡았는데 합수부에서 넘겨준 기록에, 우리가 더 첨가한 부분은 없었다. 합수부 기록을 그대로 기소하는 데 사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자들에게 ‘이 기록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으니 협조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검찰도 기소과정에서 입회 헌병들의 감시까지 받았는데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조사하는지를 꼬박꼬박 기록하고 있었다.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가공할 일이었다. 법도 사법기관도 권력자의 ‘살의’ 앞에서는 모두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당국은 변호인을 선정하도록 허락했으나 누구도 나서기를 꺼려했다. 결국 당국의 종용에 따라 사선 변호인으로 나선 일부와 국선 변호인으로 재판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선 국·사선 변호인은 모두 해서 15명. 소종팔, 신호양, 고재혁, 권종근, 김숙현 등의 국선 변호인과 허경만, 박영호, 김동정, 강대헌, 이세중, 김항석, 김수룡, 최승민, 김정환 및 김기옥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