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의 역사적인 평가기 어떻든 이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가 겪었을 심리적 갈등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구국적인 차원이었든 정치적인 야욕이었든 정치인의 변절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서 그렇다.
진술을 들어 보자. 3당 합당 직후 김영삼 총재의 솔직한 고백이다. “일단 결단을 내리고 나면 나는 앞으로 나아갈 뿐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이 평생의 생활 신조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신념이다. 그러나 90년 3당 합당을 결심하는 과정은 그렇질 않았다. 아침에는 결단을 내렸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서고, 잠들기 전에 굳게 결심했다가 자고 나면 마음이 바뀌었다. 결단을 내렸으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하는 일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그랬다. 총재님, 뒤돌아 보시만 안 됩니다. 앞을 내다보셔야 합니다. 이때를 놓치만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김영삼 총재의 고백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진술을 확인한 바 있다. 한나라당 황병태 전 의원. 89년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이다. “아니 시방 몇 신데… 새벽 2시 아니야! 이런 시간에 누가 전화를 걸고 있노. … 예, 황병태 의원입니다.” “밤이 늦었는데 미안하오. 나 김영삼이오.” “아니, 총재님 침대 머리맡에 탁상시계 있으시지요.” “시계는 뭐할라고.” “지가 어젯밤 11시에 귀가했습니다. 씻고 나서 저녁 먹고 12시가 넘어서 겨우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화를 벌써 몇 번째 하십니까? 총재 어른께선 밤잠도 안 주무십니까?”
“보소. 황 의장. 나가 밤잠을 못 이루는 지가 얼맨지 알아.” “그렇습니까?” “아는지 몰라도 나는 무신 일이든지 한 번 결정하만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가는 사람이야. 그런데 이번엔 그렇질 못해. 결단을 내렸으니까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갈라카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주저하게 돼서 앞으로 나아가지질 않는다 이 말이야. 무신 말인지 알겠어?”
여기서 다시 황병태 의원의 간접 진술이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말로 김 총재를 격려했다. ‘양김씨의 분할 구도는 여권에서 볼 때 꽃놀이팹니다.’” ‘꽃놀이패’는 바둑 용어다. 어느 한쪽이 유리한 상황에서 별 부담 없이 다른 한쪽을 골려 줄 수 있는 국면을 꽃놀이패에 비유한 것이다. 다시 말해 두 김씨가 끝까지 대권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경쟁을 계속하는 한 여권은 두 사람의 경쟁 심리를 이용해 꽃놀이패를 가지고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다.
“그 결과로 바로 87년 대선에서 두 분의 표가 나눠져 패배를 자초한 것 아닙니까. 따라서 대안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김대중 총재와 합의해서 후보를 단일화하는 방안이 있고….” “그거는 불가능해. 저쪽에서 매번 약속을 안 지키는데 그기 되나.” “그렇지요? 그렇다면 결국 총재 어른께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의 그 방법밖엔 없습니다.” “지금의 그 방법이라면 무신 방법? 노태우하고 손을 잡아서 합당하는 방법?”
“호랑이를 잡을라고 하만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여기엔 전제가 따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잡혀먹지 않는다카는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거는 걱정 마라. 나가 누군데 그까짓 고양이한테 잡아먹히나.” “고양이가 아닙니다. 호랑입니다.” “그기 그거지 뭐 달라. 고양이를 크게 그리만 호랑이가 되고 호랑이를 좀 작게 그리만 고양이 아니야.”
“마 좋을 대로 생각하이소. 어쨌든지 지금 4당 체제를 그대로 지켜나가다가는 억울하고 서러운 처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뭔가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는 우리 통일민주당은 길이 없습니다. 그런 사실은 지난번 중간평가 유보할 때 평민당이, 김대중 총재가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일은 나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야. 황병태.” “말씀하이소.” “뒤돌아보지 마라. 앞만 보고 가는 기다. 무신 말인지 알겄제.” “알겠습니다.”
89년 3월은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유보에 동의함으로써 김영삼 총재를 경쟁 대열에서 따돌린 시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2야당 총재라는 추락된 위상에 번민하던 김영삼은 이 일이 가슴에 못이 박힌 듯 천추의 한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두 달 뒤인 김영삼은 절치부심 끝에 보복의 칼날을 들이댄다. 3당 합당이었다.
▲ 3당 합당에 대해 가장 격렬히 반대한 사람은 최형우 의원 (왼쪽)이었다. 김동영 의원(오른쪽)은 그런 최 의원을 설득했다. | ||
정계 원로 C옹의 등장이다.
“어째서 그랬느냐. 87년 대선 때에 양김이 끝내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일과 관련해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는 그 책임을 몽땅 YS에게 떠넘기고 있어. 반대로 그쪽에서는 우리가 분가를 선언하고 나온 데 대해 책임을 몽땅 우리에게 씌우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여.”
어째서 그런가. 김대중 당시 총재의 설명이다. “분가의 책임은 내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YS에게 있다. 첫째로 김영삼씨는 내하고의 정치적 도의적 약속과 신의를 이행하질 않았고 당내에서의 공평하고 자유로운 경선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국민적 지지에 따른 정치적 결단을 거부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YS의 서독 발언인데 그때 김영삼씨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씨가 사면복권되면 그 사람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밀겠다.’ 분명히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을 지키지 않았다.
둘째로, 그때 나가 이렇게 제의했다. TK 공동토론이나 전국 공동유세를 통해 국민의 지지도를 측정해서 후보 단일화를 이루자. YS는 이 제의를 거절했다. 셋째는, 36개 미창당 지구당의 조직책 임명과 후보 경선의 동시적 실천을 제의했는데 YS는 이것도 또한 거부했다. 이만하면 분가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는 것 아니냐.”
DJ측의 이런 주장에 대해 YS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김대중씨가 분가를 선언하고 나간 거는 사적인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작태에 불과하다. 말로는 이념과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분가할 수밖에 없다캤는데 우리 민주당하고 평민당하고 이념이나 노선에 다른 기 뭐 있는가. 5공 시절, 나는 민추협을 만들고 신민당을 창당하는 등 일관되게 전두환 정권에 대항했다. 그때 김대중씨는 어데서 뭐하고 있었나.
대통령 후보에 나서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나가 아니라 DJ가 먼저였다. 그때 DJ가 내한테 뭐라고 한 줄 아는가. 자신은 후보 경선에 나서지 않겠다. 그라기 위해서는 지지자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달라. 이래 놓고는 지지자들을 설득한 기 아니라 부추겼다. 자기가 아니만 안 된다, 이거였다. 그래 놓고 당내 세력의 약화를 의식하자 시간을 벌기 위해 오만 가지 방법을 다해 후보 단일화 작업을 지연시켰다. 그기 바로 DJ의 일관된 행동 패턴인데 이제 와서 무신 딴소린가. 나가 한 가지 숨은 얘기를 소개하겠다.”
숨은 얘기란 어떤 것인가. “87년 10월 나가 김대중 총재에게 제의했다. 합동의원총회를 열어 후보 단일화를 결판내자. 그랬더니만 그때 DJ는 함석헌옹이 위급해서 병원에 입원했으니 가봐야겠다, 이러면서 빠져 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때 함석헌옹은 병원에 입원한 게 아니라 집에 있었다. 전혀 위급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서로가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고 있고 이현령 비현령의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다.
“전화바꿨습니다. 나 김동영입니다.” “정호용입니다. 그냥 듣기만 하소. 오늘 저녁 6시 내하고 좀 만납시다. 장소는 지난번에 만났던 P호텔 있지요. 거기가 좋겠습니다. 보안이 필요하니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시는 기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통일민주당 정책위 의장이었던 황병태 전 의원이다. “민정당하고의 합당을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거는 이른바 YS 가신들의 반발이었다. 황아무개가 YS를 팔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꼭 한 사람 합당을 지지해준 사람이 있었다. 고 김동영 의원이다.” 그리고 3당 합당 당시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던 사람은 통일민주당 최형우 의원이다.
“90년 1월22일 김영삼 총재는 전격적으로 민주 민정 공화 3당의 통합을 발표했다.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그렇게 빨리 구체화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한 채로 앉아 있었다.”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 최형우 의원의 인생 노트는 계속된다. “대청봉에 올라 더 현명한 판단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몇 차례, 그때 내 생각은 이랬다. 도대체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여야가 정당한 지지를 받아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위해,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디어온 지난 세월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산에서 돌아와 나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기택 김원기 신상우 그리고 김동영 의원이다.”
당시 김동영 의원의 설득이다. ‘총재하고 같이 가는 기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 의원이 어떻게 김 총재를 배신할 수 있나. 김 총재 없이 우찌 최 의원이 있고 최 의원 없이 우찌 김 총재가 있을 수 있나 말이야.’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주장한 것은 아니다. 반대도 있었다. 통일민주당에 남아 야당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마침내 나는 결단을 내렸다. 김영삼 총재를 만난 것이다.”
한편, 그러는 가운데 89년 5월31일. 노태우 김영삼 청와대 회담이 이루어졌다. C옹의 설명이다. “첫째, YS의 소련 방문에 따르는 정부 차원의 지원 문제를 논의하고, 둘째는 당시 정치권의 가장 큰 현안으로 돼있던 5공 청산 문제, 그중에서도 특히 전두환 최규하 두 전직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5공 핵심 6명의 처리 문제, 여기서 5공 핵심 6명은 야3당 총재 간에 합의된 이희성 이원조 정호용 안무혁 장세동 및 허문도의 6명이다.
셋째는 그 해 3월에 일어난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 4월에 발생한 동해시 보궐 선거 후보 매수 사건, 통일민주당 심완구 의원의 경찰관 폭행 사건, 같은 당 이인제 대변인의 후보 매수 시비 등이다. 이 모든 사건이 한 묶음으로 올려져서 논의가 됐다. 그리고 네번째는, 바로 이 네번째가 이날 양자 회담의 핵심인데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합당 문제였다.”
장장 4시간30분에 걸친 마라톤 회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