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정권 당시 남북간의 비밀 접촉은 85년 3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당시 이세기 통일원장관이 북한 적십자 손성필 위원장에게 서울에서 열리는 남북 적십자회담 때에 막후 접촉이 가능한 밀사를 보내달라 하는 요청을 한 것이 주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열린 제8차 적십자 회담 때 북측이 림춘길 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과장을 보내오고 우리 쪽에서 당시 한상일 안기부장 비서실장을 카운터파트로 내세움으로써 남북간의 막후 채널이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철언 전 의원의 진술을 들어 보자. “시작은 그런 식으로 된 것이 사실이다. 그때 이 막후 채널의 명칭은 좀 길었다. ‘남북간 평화통일을 위한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고위급 실무회담’이었다. 실무 회담은 차관급으로 돼 있었다. 내가 수석대표를 맡고 통일원이 수행을 하고 후반부에 와서 안기부에 파견돼 있던 강재섭 검사가 추가로 합류했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부 한시해 부장이 나왔다. 그래가지고 91년까지 약 7년 동안 지속이 됐는데 그 사이에 남북간 교류협력과 평화 공존 문제 그리고 통일 방안에 대해 실무적인 합의를 봤다.”
기자의 질문이다. “비밀협상 당시에 남쪽 수석 실무 대표인 박 보좌관의 직책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돼 있는데 이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나?” 박철언 전 보좌관의 답변이다. “아니다. 그게 아니라 당초 약속이 돼있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부장 검사로 1급 예우 파견이었다. 수석 대표로 임명하면서 직급을 올려주질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발령을 냈는데 명목상 그 자리가 차관급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 허담 회담의 실무 추진자 정재문 의원의 설명이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측은 처음 김영삼 총재의 카운터파트가 누구냐고 하자 모른다고 했다. 평양에서 직접 파견되기 때문에 자기네들도 밀사가 도착해 봐야 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6월3일, 회담 일자를 6월5일로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밀사의 이름을 밝혔는데 김인철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한 시간도 못돼서 이름이 바뀌어서 이번에는 김중린이라고 했다. 이처럼 밀사의 이름이 바뀐 거는 북한대사관측에 무신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런 사실은 윤태영 북한 참사관조차 짜증을 내는 것으로 봐서 알 수 있었다.
자 그렇다면 북한 대사관에서조차 알지 못하는 평양 밀사는 누구였나. 아니 그보다 밀사를 정하면서 갈팡질팡한 것은 무슨 이유였느냐. 그때 우리의 추측은 이랬다. 밀사를 결정하는 것은 김정일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행부서에서조차 누가 모스크바에 가게 될 것인지 알지 못했고 김정일이 지명해서 모스크바로 출발할 무렵에야 비로소 밀사의 정체가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최종적으로 드러난 평양 밀사는 조평통 즉 조국평화통일 위원회 허담 위원장이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6월5일 아침 북한 대사관 윤태영이 다시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정재문 의원이 전화를 받았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정재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윤태영입니다.” “아, 윤 참사관. 어떻게 평양 밀사가 도착했습니까?” “실은 그 일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원래는 평양 밀사가 오전 11시에 도착하기로 돼 있었는데 시간이 변경돼서 오후 4시에 도착한다고 합네다.” “오후 4시면 우리 김영삼 총재하고 만나는 시간 아닙니까?” “기러니까 이렇게 전화를 드리는 거 아닙네까. 기래 가지구 평양에서 지령이 내려왔는데 회담 시간을 9시30분으로 연기하랍네다. 받아들일 수 있갔습네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좀 곤란한데….” “압니다. 알아요. 내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디만 어떡합네까. 한 번만 더 봐줘야갔습네다.” “그렇다면 장소는 어떻게 됩니까? 변경 없습니까?” “그것도 변경이 있습네다. 그 시각에는 프라하 식당은 문을 닫으니까 이용할 수가 없습네다. 기래서 IMEMO(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측에 얘기했더니 시방 김영삼 총재가 묵고 있는 돔 퓨류에모프 영빈관에다가 회담장을 마련할 테니까 이용하라는 회답을 받았습네다. 자 기럼 오늘 밤 9시 반 돔 퓨류에모프 영빈관에서 만나십시다.”
한편, 서동권 안기부장은 90년 9월30일부터 10월2일까지 2박3일간 평양을 방문한 바 있다. 89년 여름 박철언 정무장관의 평양 축전 개회식 참가 사실이 폭로된 이후 그의 대북 밀사로서의 역할엔 종지부가 찍혔다. 90년 8월 서울에서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그 해 9월 말 판문점을 통해 한국의 고관 3명이 승용차편으로 개성으로 들어갔다. 서동권 안기부장, 이병룡 안기부장 특보, 그리고 김용환 안기부 국장급의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개성에서 헬기편으로 약 50분을 비행하여 평양 근교 헬기장에 착륙했다.
여기서 다시 승용차편으로 안내된 곳은 흥부초대소.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10월1일 오전 10시 다시 승용차편으로 약 30분을 달려 평양 주석궁 근처 산속의 김일성 별장에 도착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현관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의 세 사람과 북쪽의 세 사람은 곧 바로 회담에 들어갔다.
당시 북쪽의 세 사람은 김일성, 김정일에다 로동당 대남사업 담당 비서 윤기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동권 부장이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김일성에게 전달하고 내용을 설명했다. 다 듣고 나서 김일성이 입을 열었다.
“설명을 요령 있게 잘 하셨는데 결국 통일하자는 거 아닙네까? 기리구 정상회담 하자는 거디요. 기렇지요?” “그렇습니다.” “좋은 얘깁네다. 당연한 얘기디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7천만 동포 중에 통일하지 말자는 사람 있습네까? 없습네다. 기런데 와 통일이 안되는가. 통일로 가는 데 원칙이 없어서 기렇습네다. 목표가 없어요. 덮어놓고 통일하자 이거 안됩네다. 기래서 내레 다시 한 번 제의합네다. 남쪽에서 우리가 제의한 고려연방제 수용해야 됩네다. 기러기 위해서 남북간에 정치 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합네다.”
남북간 정치 회담은 한국의 대통령을 남쪽의 여러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남쪽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서동권 안기부장은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 내용에 따라 제의했다. “북측의 고려연방제 통일안과 우리 남측의 한민족공동체 통일안은 각각 나름대로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안을 가지고 장단점을 보완해서 합의를 도출하는 기 어떻습니까. 그라기 위해서 남북 간에 통일위원회 같은 것을 설치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연구해 봅세다. 기러나 방법은 한 가지뿐입네다. 우리의 고려연방제를 남쪽에서 받아들이는 것 말입네다. 그렇지 않습네까. 동지들.” 김일성은 시종 우월감을 과시하면서 남쪽 사람들을 대했다. 그것은 오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몸에 밴 것이었다. 6공 정권의 북방정책의 완결을 위해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의 모스크바 방문을 앞두고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외교 경험이 없는 김영삼 총재의 모스크바 방문. 특히 공산주의 체제와의 협상은 민주주의 국가와는 매우 달랐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박철언 등 반 김영삼 세력의 비난도 우려되었던 것이다.
“정책보좌관 전화입니다.” “무신 일이야.” 박철언 보좌관은 전화로 노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는 극소수의 핵심 중의 한 사람이다. “지가 시방 통일민주당 황병태 의원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과 관련해서 지한테 무신 지침을 받으라고 하셨다카는데 그기 무신 말입니까?“그거는 나가 김영삼 총재에게 권고한 사항이야. 모스크바에 가면 평양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남북 간의 접촉 현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가는 기 좋겠다. 대북 관계는 시방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총괄하고 있으니까 한 번 만나서 브리핑을 받으라 이렇게 말이야.”
“그러만 지가 김 총재에게 남북 현황에 대해 브리핑을 해줘야 됩니까? 그럴 경우에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합니까?” 박철언 정책 보좌관은 못마땅했다. “그기 무신 말이야?” “남북간의 접촉 현황을 몽땅 다 보여 줄 수는 없잖겠습니까?” 노태우 대통령도 이들간에 알력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거는 박철언이가 알아서 할 일인데 내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나. 다만 한 가지 정책보좌관이 알아둘 게 있어. 우리의 입장은 김 총재의 소련 방문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여기서 진술이다. 6공 청와대 Y비서관의 증언이다. “5월31일 노태우 김영삼 청와대 회담에서 김영삼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묻고 있다. ‘내가 이번에 모스크바에 가면 평양 사람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회의장이나 또는 숙소로 찾아올 경우에 나가 어떻게 대응하면 되겠습니까?’ 노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거는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럴 경우에 굳이 만나기를 거부하거나 피할 이유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 일은 대북 관계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부서가 있으니까 한 번 만나서 상의를 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거기가 어뎁니까?’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관장하고 있는 대북팀입니다’.” 계속되는 Y비서관의 진술이다. “김영삼 총재는 자신이 직접 박철언 정책보좌관을 만나지는 않고 황병태 정책위의장을 보내서 남북간의 접촉현황을 브리핑 받도록 했다. 그래서 평양 사람들을 만날 경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조언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됐다. 만일 김영삼 총재가 모스크바에서 평양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상대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시나리오가 서울을 떠나기 전에 이미 작성돼 있었느냐 아니면 현지에 도착해서 작성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에 수행했던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황병태 전 의원에게서 들을 수 있다. “시나리오는 이미 작성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에 정재문 의원을 모스크바에 보내서 정지 작업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밝힐 일은 우리 통일민주당과 평양 사이엔 소련의 IMEMO, 공식명칭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김영삼 총재가 평양 사람하고 만나는 일을 IMEMO가 가운데서 중재역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김영삼과 허담의 모스크바 회담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경과는 그랬다. 그리하여 6월5일 밤 돔 퓨류에모프 영빈관에서 또 하나의 남북회담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