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 윤태영 사무관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은 6월5일 오전 11시였다. 윤 참사관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은 회담 시각을 연기하자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비행기 시간이 여의치 않아 회담 시각 연기가 불가피하다. 평양 밀사는 조평통 위원장으로 통보를 받았다. 결국 그 전화를 받고 비로소 우리는 김영삼 총재의 회담 카운터파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이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미루어 볼 때 평양 수뇌부가 김 총재하고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극비리에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런 사실은 허담이 직접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모스크바로 날아 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김 총재와의 회담에서 허담이 스스로 밝힌 일이다. 그리고 허담이 회담장에 나오면서 공동 발표문까지 작성해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었다.’이 진술을 뒷받침하는 <동아일보> 정치부 남찬순 기자의 김영삼과 허담의 모스크바 회동 그 막후 기록이다.
‘김영삼 허담의 모스크바 회담은 김영삼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고 그리고 허담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를 받고 나왔다는 사실에서 이 회담에 거는 서울과 평양의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사실은 첫째, 김영삼 총재가 15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회담내용을 소상히 통보하고 있다는 점. 둘째, 허담과의 회담에서 한 김영삼 총재의 발언, 즉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발판으로 해서 빠른 시간 내에 노태우 김일성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 셋째, 이 같은 김 총재의 발언에 대한 허담의 반응이다. 그것은 ‘김 총재와 노 대통령은 합작관계다’ 하는 사실을 강조한 점 등이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김영삼 허담의 모스크바 회담이 이루어진 시점은 국내에서 정계개편 3당 합당의 시나리오가 공식화되고 있지 않은 시점이다. 그런데 허담은 어떻게 김영삼 총재를 노태우 대통령과 합작관계다 하는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선 89년 6월5일 김영삼 허담의 남북 회담이 열린 그 현장으로 가보자. 회담 날짜는 6월5일 오후 6시 반. 장소는 모스크바 돔 퓨류에모프 영빈관. 주역인 김영삼 총재와 허담 위원장 외에 배석자는 남쪽에서 통일민주당 김상현 부총재, 황병태 위원장, 박관용 국회 통일특위 위원장. 그리고 북쪽에서는 전금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안병수 부국장이다. 허담 위원장의 발언 내용을 보자.
“내외 사정으로 보나 또는 국내 사정으로 보나 통일을 이루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는 남쪽의 일부 세력 중에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런데다가 미국과 일본은 조선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들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통일은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고려연방제가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합리적이라고 본다.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 남북간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우선으로 전쟁의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 정전상태를 평화적 상태로 바꿔놓기 위해 먼저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하고 북남간의 불가침 선언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는 그런 목적으로 고위 정치군사회담을 제의한 바 있으나 남쪽에서는 아직도 연례행사처럼 팀 스피리트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문익환 목사 사건만 해도 그렇다. 문 목사는 통일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평양에 왔는데 돌아가자 마자 체포됐다. 이래가지고 대화가 되겠는가.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민족회의, 즉 정당 사회단체 연석 회의가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허담의 발언에 대해 김영삼 총재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 89년 6월 모스크바에서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만난 YS는 다음해인 90년 다시 소련을 방문해 야코블레프 정치 국원과 회담을 했다. | ||
“남북 문제는 무엇보다 서로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다가 중단되고 있는 각종 회담을 즉각 재개할 것을 권고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북 국회회담 같은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곧바로 재개돼야 되며 그밖의 스포츠회담이나 적십자회담 등도 다시 시작해서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통일 문제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인 접촉과 대화는 양측 정상들이 만나는 일보다 그 어떤 방법도 여기에 우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깜짝 놀랄 김 총재의 발언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자리를 빌어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지난 79년 나는 홍콩 발언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날 용의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또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 말을 취소하고자 한다. 어째서 그런가. 김 주석을 만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노태우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서로가 상대방을 폭력으로 타도하거나 전복시키겠다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는 일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폭력으로는 남북간의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3당 합당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 9단’ 김영삼 총재의 상황 인식이다.
89년 6월 김영삼 허담 모스크바 회담 배후에는 남북한과 소련으로 이어지는 3각 구도에서 균형을 취하려는 소련 정부의 대 한반도 전략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영삼과 허담의 모스크바 회담을 주선한 것은 소련 정부를 대리하는 IMEMO, 즉 세계경제 및 국제문제연구소. 그렇다면 IMEMO와 소련 정부는 무엇 때문에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애써 성사시키려고 했는가.
89년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남찬순 기자가 그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5월29일 IMEMO가 김영삼 허담 회담의 중재역을 맡아 이를 성사시키기까지 소련의 역할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조정역에 불과했지만 기실 내면적으로는 남과 북 양측의 입장을 철저히 연구 분석하고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심사 숙고한 끝에 결단을 내린 신중한 선택이었다.
소련 정부가 이처럼 자신들의 역할에 신중을 기하며 지극히 조심스럽게 접근한 데는 남과 북 양측이 다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대라는 전제가 있었다.
우선 북한은 소련으로서는 등을 돌릴 수 없는 정치 외교 및 군사상의 절대적 우방국이다. 반면에 한국은 자신들이 직면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반드시 손잡아야 할 경제 협력국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경제 파트너로 그들은 오래전부터 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내용의 다른 분석이다. 황병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남북간의 갈등을 최소화시키면서 남과 북, 소련으로 이어지는 3각 관계의 정점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맡는 게 최상의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김 총재가 소련에 갔을 적에 크게 놀란 것은 모스크바 방송이 현실적으로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하는 듯한 논평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소련의 입장은 김 총재를 초청한 IMEMO와 외무성의 상반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났는데 IMEMO가 경제적인 협력 차원에 비중을 두면서도 한국이 요구하는 정치적인 협력에도 상응하는 태도를 취한 데 반해, 외무성은 김 총재의 외무성 방문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북한과의 신의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소련이 김영삼 허담 회담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선한 데는 이와 같은 이중적인 대 한반도 정책의 모순점을 극복하려는 고육지책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으로서는 남쪽이나 북쪽이나 그 어느 쪽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간의 갈등을 최소화시키면서 남과 북 그리고 소련으로 이어지는 3각 구도의 정점에서 조정역을 맡고자 한 것이다.” 어쨌든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의 목적은 3당 합당이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론이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 다시 남북 관계와 관련된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자. 89년 9월31일부터 10월2일까지 서동권 안기부장이 2박3일간 평양을 방문,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만나고 온 것이다. 김일성은 당시 회담에서 서동권 안기부장을 각하라고 불렀다.
“서동권 안기부장 각하.” 서동권 안기부장은 김일성을 수상이라고 불렀다. “예, 수상 각하.” “기러니끼니 요약하면 이렇게 되갔습네다. 남쪽에는 남쪽의 통일 방안이 있고 우리 북쪽에는 북쪽의 방안이 있으니까니 이 두 개의 통일 방안을 개지고 정상 회담을 열어서 하나의 단일화 통일 방안으로 만들어 보자. 이런 얘기지요.”
“그렇습니다.”
“기것도 일리가 있기는 있구만. 기렇지 않아 윤기복이?”
윤기복은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다.
“뭔가 생각을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수상 동지.”
“기거이 무슨 소리야.”
윤기복의 설명이다.
“근본적으로 남조선의 통일 방안하고 우리 공화국의 방안하고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 공화국의 고려연방제는 지방정부 형태의 연방정부를 지향하고 있는데 비해 남조선의 통일 방안은 국가 형태의 연방제안입니다. 기런데 어떻게 이 두 가지 방안을 가지고 단일화된 통일 방안을 만들어 낼 수 있갔습네까?”
김정일 비서가 끼어 들었다. “이보라우 윤기복 위원장.” “예. 비서 동지.” “수상 동지께서 윤 위원장에게 물어본 것은 동의를 요청한 거야. 기런데 시방 무슨 엉뚱한 수작을 하고 있나.” “기렇지만….” “기래도 기렇디만이야. 할 말이 더 있다는 거야.” “이 자리는 남북관계의 진로를 결정하는 자립니다. 신중을 기하지 않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낭패한 지경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기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수상 동지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봐.” 마침내 김일성 주석이 나서서 아들을 말렸다. “아, 김정일 비서.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그만하라.” 남북 관계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영삼 허담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지 않겠다는 뜻밖의 발언에 이어 허담의 발언이다.
“북남 대화는 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기러나 군사, 정치적 문제로 해서 분위기 조성조차 안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군사 문제를 푸는 거이 우선이며 주한미군 문제와 남쪽의 핵무기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대화 분위기 조성이 어렵다.”
상호 입장을 확인하는 절차가 만만치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