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시민들과 만나고 있는 김영삼 총재. [91보도사진연감] | ||
남북 비밀 접촉과 관련하여 6공 정권의 대북관계를 총지휘했던 박철언 정책보좌관에 대한 질문이다. “85년에서 91년에 걸친 약 7년간의 남북 비밀 회담에서 우리측은 우선 정상회담을 성사시키자. 두 정상이 만나 자유롭게 얘기하다 보면 큰 틀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주장해서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비중을 두었다고 한다. 사실인가?”
박철언 보좌관.
“그렇지 않다. 당시 우리의 입장은 실무급에서 모든 문제에 합의를 본 후 정상회담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주장은 북측 협상 대표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비밀 회담이 열렸을 때는 그랬다.
북측은 모든 문제를 실무회담에서 완벽하게 합의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의 입장은 모든 문제를 실무회담에서 합의를 이루는 것보다는 두 정상이 만나 자유롭게 토론하는 과정에서 돌파구를 찾게 하자는 유연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입장은 비밀회담을 풀어가는 하나의 기술일 뿐, 실제로는 실무급에서 완벽한 합의를 도출해내자는 것이었다.”
다시 기자의 질문.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장소는 서울이든 평양이든 다 좋다. 제 3국도 가능하다.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보다 빠른 시일 내에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라는 것이었다. 사실인가?” “군 출신은 단순하다. 한다는 방침만 세워지면 하는 것이다. 두 정상이 만나서 풀지 못할 문제가 어데 있겠느냐. 어디서 만나든 상관없다. 이런 식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실무진에서는 그렇게는 안 된다. 차곡차곡 가닥을 잡아가야 하며 그렇지 않고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85년 9월 평양 밀사 허담이 서울을 방문했다. 이때 허담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 내용은 이랬다.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 각하.
각하. 나는 이번에 대통령 각하가 북남 최고위급 회담을 진행하기 위하여 평양을 방문할 때 대한 의향을 표명하신 것과 관련하여 그 준비사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허담 동지를 나의 특사로 서울에 파견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하에게 따뜻한 문안의 인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허담 비서는 나의 대리인으로서 서울에 가면 대통령 각하에게 보내는 나의 말을 전하게 될 것이며 각하의 평양 방문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문제들을 협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 각하가 그를 신임하고 평양에서 북남 최고위급 회담을 진행하는 데서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충분히 협의하여 주기 바랍니다. 나는 대통령 각하의 호의적인 관심 속에서 나의 특사의 서울 방문이 좋은 결실을 가져오며 각하와의 뜻깊은 평양 상봉이 꼭 이루어지게 될 것을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나는 대통령 각하가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
1985년 9월3일 평양.’
그로부터 4년 뒤 89년 6월 소련 방문 길에 나선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모스크바에서 85년 9월 서울을 방문했던 허담과 김영삼 회담을 열고 있다.
6월5일 돔 퓨류에모프 영빈관의 회담 현장이다. 북측 대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의 발언이다. “남쪽엔 아직 미군이 버티고 있고 핵무기를 들여다 쌓아놓고 있다. 이것 때문에 북남 대화가 잘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 선생께서 말씀하신 북남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우리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정상회담을 통해 북남간의 문제가 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 사건 등이 장애가 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정상회담은 어렵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삼 총재의 답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은 전쟁을 억제하고 순수한 방어를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분위기가 조성돼야 하고 남북간에 신뢰가 쌓여야 한다는 허담 위원장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 평화가 보장될 수 있다는 확신만 서게 되면 모든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만 내가 보기엔 북쪽은 남쪽을 잘못 판단하고 있고 한국 국민들의 사상을 변화, 공산화시킨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익환 목사 사건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문 목사가 왜 정부와 한마디 대화도 없이 밀입북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양에 갔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통일 문제에 관한 한 아무 것도 숨겨서는 안되며 떳떳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도 남쪽이나 북쪽이나 서로 내정에 간섭하는 듯한 언행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남쪽에는 여와 야가 있고 각기 서로 다른 목소리가 있다. 야당은 자기 목소리를 가지는 게 관례인데 당국은 통일 문제를 일원화해서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없지 않다. 대학생들이 국토 행진하겠다고 하다가 정부의 승인이 없어 하지 못했다. 13차 평양축전 참석도 정부에서 부당하게 간섭해서 잘 안 되고 있는데 인민은 인민의, 그리고 야당은 야당의 주장이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김영삼 총재의 답변.
“통일 논의는 다양할수록 좋다. 우리 통일민주당도 통일 문제에 대한 주장이 있고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북쪽하고의 대화는 창구가 일원화돼야 한다. 창구를 다원화하면 중구난방이 돼서 될 일도 안된다.
누가 집권을 하든 국민의 지지를 근거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단일화된 창구를 통해 대화를 해야만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허담은 김 총재에게 질문했다.
“김영삼 총재 선생 내레 한 가지 물어봐도 되갔습네까?”
“허담 위원장께서 내한테 물어 볼 말이 있습니까?”
“우리는 남한의 대학생들이 자주 통일을 하기 위해 평양으로 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네다. 기런데 정부는 물론이고 통일민주당조차 대학생들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적극 반대하고 있는데 이것이 대체 무슨 이윱네까?”
김영삼 총재의 설명이다.
“남북 학생들간의 교류에 대해서는 정부는 물론 우리 통일민주당도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우리 대학생들의 일방적인 평양 방문입니다. 남북관계는 서로 상대가 있는 것이므로 서로간의 대등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제의합니다. 우리 쪽에서 1천 명의 대학생들을 평양에 보내면 평양에서도 1천 명의 대학생들을 보내야 한다 이겁니다. 그렇게 하면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의 진정한 교류가 되지만 일방적으로 우리 대학생들을 오라고 하는 것은 혼란을 조성할 불순한 목적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여기서 진술이다.
89년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황병태 전 의원이다.
“당시 허담은 김영삼 총재에게 평양 방문이 아직도 유효하다. 용단을 내려라 이렇게 요구하고 있는데, 그 때 북측이 이처럼 김영삼 총재의 평양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발벗고 나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 노태우 대통령도 YS와 북한의 회담을 지원했다. | ||
첫째는 이때가 김 총재를 만나 직접 평양 방문을 설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는 사실이다. 이때까지 김일성 주석은 한국의 중요 인사들에게 몇 차례씩이나 편지를 보내 방북을 요청했으나 편지를 받은 모든 인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둘째는 소련이 김 총재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김 총재가 소련과의 관계 설정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고 있으므로 양국간의 관계 설정을 빌미로 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면 먹혀 들어갈 수도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셋째는 한국의 정치상황과 김 총재의 이상으로 볼 때 북측의 방북 초청이 상당한 실효성을 거둘 것으로 분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김 총재는 여러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김 총재의 평양 방문을 강력히 끈질기게 요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영삼 허담의 남북 회담은 평양을 방문해 달라는 북측의 제의를 김 총재가 거절함으로써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나 버렸다.
남북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그리고 헤어졌다는 단순한 성과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89년 6월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은 단순히 허담을 만나기 위한 목적의 여행은 아니었다. 여기엔 앞에서 이미 밝혔듯 국내 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정치적 목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허담과의 남북회담에 비중이 모아졌던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삼 허담 회담이 남긴 남북간의 손익계산은 어떻게 되는가.
89년 7월 <동아일보> 정치부 남찬순 기자의 기록에서 보자.
김영삼 허담 모스크바 회동 막후의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측은 이 회담을 통해 그 해 3월 문익환 목사를 초청한 것과 같은 대남 전략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 남한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역이용, 각계 각층간의 세력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통일전략의 실효를 높이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남쪽 입장에서는 김영삼 총재가 지금까지의 정부 방침을 재확인해 줌으로써 북측이 이용하려는 공간의 폭을 좁히는 실익을 거두었다. 김영삼 허담 회담에서 김 총재가 보인 언행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 것 또한 이 때문이다. 남북간의 전반적인 관계에서 볼 때 남측으로서는 남북 최고위급 인사들이 한 자리에 마주앉아 두 시간 이상이나 얘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에서 이미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국의 수도 모스크바의 깊은 밤, 하늘 높이 치솟은 고층 아파트가 바라보이는 돔 퓨류에모프 영빈관에서 밤늦게 열린 김영삼 허담 회담을 주선한 IMEMO가 스스로 평가했듯 남과 북의 대화의 한 장으로 기록된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YS가 노 대통령 위상 높여주었다
당시 회담에 대한 박철언 보좌관의 분석이다.
“정계개편에 대한 가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회담에 임하는 김 총재의 언행에서 그런 사실을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허담이 요구한 남북간의 대화 창구를 다양화하라는 주장에 김 총재가 정면 거부하고 나섰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밖에도 김 총재의 발언을 보면 여러 곳에서 정부 정책을 옹호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미군 주둔 문제와 관련한 허담의 비난에 대한 답변인데 정부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노 대통령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총재는 3당 합당에 동의한다는 것을 북국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그렇게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