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 7월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단독회담 | ||
추석이 지나면 여러 가지가 정리되고 가시화될 전망이다. 앞으로 전개될 정계개편은 지난 89년 3당 합당 과정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지켜보는 것이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89년 당시 세 야당, 즉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야 3당은 민주정의당과의 합당을 앞두고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계파 분열의 양상을 보면 앞으로 있게 될 우리 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합종연횡하게 될지를 예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술이다. 세 야당 총재들 사이에 나타난 분열의 조짐. 당시 통일민주당 황병태 정책위의장이다.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세 야당 총재간에 분열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7월10일 청와대 단독 회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김종필 총재가 말한 이른바 차선책 발언이었다. 당시 JP는 ‘가능하면 야 3당 총재들이 합의를 본 사항은 지켜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또 상대가 있는 것 아닌가? 경우에 따라서는 차선책을 강구해서 최선에 대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냐. 뒤늦게 알려진 일이지만 이날 노태우 대통령은 김종필 총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야 3당 총재들이 전직 두 대통령의 국회 증언을 결정한 배경은 나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거는 야 3당 총재들의 사정이고 나는 입장이 좀 다르다. 서교동은 몰라도….’ 서교동은 최규하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입장이다.
“백담사에 가 있는 또 한 사람의 전임은 내가 그 사람을 국회 증언대에 끌어낸다카는 거는 인간 노태우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의 자리를 걸고 나는 이 일은 못하겠다. 김 총재께서 좀 이해해 달라.” 이에 대해 김종필 총재의 답변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심정은 내가 이해한다. 그러나 전임 두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정호용 의원 등 5공 핵심으로 분류된 6명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는 정국 상황에 진전이 없을 것이 뻔하다. 그랬더니 노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정호용이하고 내하고의 관계는 새삼스럽게 말씀 안드리겠다. 다만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호용이는 내 손으로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킬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러길래 나는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 시절에 나는 시국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도 했고, 또 자리에서 물러나 혼란을 수습하고 그랬다. 그런데 시방 대통령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 다시 황병태 전 의원의 진술이다.
“JP의 차선책 발언은 여기서 나왔다. 이미 민정당과의 합당에 합의하고 있었던 것은 노 대통령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와주자는 결심 하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을 강구할 수도 있다. 이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JP의 생각이고 김대중 총재나 김영삼 총재는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야 3당 총재들이 합의사항 파기다 해서 반발하고 나섰는데 뜻밖에도 신민주공화당측이 역공을 하고 나섰다.” 당시 신민주공화당 김용환 의원의 격앙된 목소리이다.
“청와대 회담에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말이 달라지는 것은 JP가 아니라 DJ하고 YS다. DJ는 중간평가 위헌론을 제기했고 YS는 여권에서 기대하는 5공 핵심들의 국회 고발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그래 놓고 어떻게 합의사항 파기의 책임을 JP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나!” 이 같은 내용의 목소리가 JP 본인한테서도 나왔다.
“청와대에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말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아느냐. 노태우 대통령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 5공 청산과 관련해서는 DJ나 YS가 이미 양해를 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느냐.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DJ나 YS가 청와대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이러한 상황에서 평민당은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화근이 되어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맞게 되는 것이다. 안기부 출신 P국장이다.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은 한마디로 여권 핵심부, 여기엔 물론 노태우 대통령도 포함되지만, 여권 핵심부로 하여금 김대중 총재에 대한 거부감을 확인케 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김 총재의 진보적 성향에 의구심을 느끼고 있던 우익 보수 세력들, 특히 군부와 군부 출신들이 마치 확증을 잡은 것처럼 느낀 사건이 바로 문 목사 밀입북 사건이었다. 물론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김 총재가 문 목사의 밀입북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여비로 3백만원을 보태주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생활비든 여비든 그런 것은 그후 김 총재의 대응에서 충분히 밝혀졌다. 평민당측은 적극적인 대응은 못했다. 방어적이며 수세적으로 극히 소극적인 대응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이 터지자 김대중 총재는 정부측에 몇 가지 유화적 제스처를 쓰고 있다. 문 목사와 자신과의 통일관이 다르다는 입장 표명과 함께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갈등을 빚고 있던 노사분규, 학생 시위 등에 대해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 등이 그 것이다.
그러나 파격적인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끝내 김대중 총재를 소환 조사했다. 김 총재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바로 그 직후. 6월3일 광주교육대학에서 있었던 대중 연설에서 김 총재는 5공 청산과 조속한 민주화 일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연설 내용이다. ‘광주 학살의 책임자를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처벌해 억울하게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한을 풀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요구합니다. 5공 청산은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조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 일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 김대중 총재의 모습 | ||
그렇지 않고 이유 없이 지연시킬 때는 나는 노태우 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이 위기 상황으로 몰릴 때 통일민주당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이 자신과의 합당만 추진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공화당도 참여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김영삼 총재와 황병태 의장의 대화다. “이, 참 무신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황 의장.” “말씀하이소.” “말씀하이소가 아니야. 황 의장 이 시방 뭐라 캤나. 신민주공화당이 참여한다 캤나.” “아직은 꼭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감으로 그렇게 느껴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얘기 아니야. 저쪽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거 같애서. 참 내가 저 쪽에다 전달하라고 한 거는 전달했나.” “합당의 전제가 되는 조건들 말씀입니까?”
“거기에다가 내가 학실하게 표시했어. 합당은 우리 통일민주당하고 민정당하고 두 당에 한한다. 그 밖의 정당들, 특히 유신 잔당인 신민주공화당은 절대로 참여시킬 수 없다. 이렇게 말이야.”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나. 신민주공화당을 참여시킨다는 얘기가 어떻게 나오나 말이야.” “지가 말씀을 드렸잖습니까. 아직 공식적으로 제의가 들어 온 것은 아니고 박철언 보좌관하고 얘기를 진행하는 중에 언뜻 감을 잡았다….”
“박철언이가 뭐라고 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애당초 자신이 구상한 것은 양당 합당이 아니라 4당 합당이었다.” “뭐가 어째? 4당 체제에서 어떻게 4당이 합당을 하나? 그건 합당이 아니라 통합 아니야. 완전 사기구만 사기. 황 의장.” “예.” “나가서 당장 박철언이한테 전화해. 아니야 그럴 거 없어 여기서 당장 전화해. 이번 합당에 신민주공화당을 참여시킨다면 우리는 빠지겠다고 말이야.”
여기서 진술이다. 김영삼 총재는 김종필 총재에 대해서 왜 그렇듯 강경했는가. 통일민주당 황병태 정책위의장이다. “김영삼 총재가 신민주공화당에 대하여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신민주공화당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JP 김종필 총재에 대한 반응이었는데 한마디로 인간적인 불신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나가 말이야. JP한테 두 번 속았어. 한 번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87년 대선 때 일이야. JP는 내 손을 들어 주겠다고 분명히 약속을 했는데 막상 선거가 임박해서는 약속을 어기고 내한테 식언을 한 기라. 나가 제일 싫어하는 기 뭔지 알아. 돈과 관련된 스캔들, 그리고 정치인의 거짓말이야. 또 한 번은 83년의 경험인데 목숨을 걸고 23일간의 단식을 감행할 때 일이야. 그러다가 싸우기 위해서 단식을 중단하고 나와 민추협을 발족시키는데 JP 문제가 제기됐어.”
민추협. 즉 민주화추진협의회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정계 원로 C옹이다. “민추협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종로 네거리 보신각 뒤편의 대왕빌딩이다. 여기가 바로 그해 84년 5월에 발족한 민주주의의 산실 민추협 사무실인데 정확히는 종로구 관철동 45번지의 1호 대왕빌딩 13층 2호실이다. 그래봤자 몽땅 합해서 한 20평 됐나. 비좁은 사무실에 식구나 적은가. 들어서기만 하면 꼭 한증막 같은데 재미있는 것은 승강기가 12층밖에 안 올라가. 그래서 13층 사무실에 가자면 한 층은 걸어서 올라가야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향수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JP에 대한 김영삼 총재의 기억이다.
“이 사람을 가입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건데 솔직히 JP는 대상이 안 돼. 민추협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건데 거기에 어떻게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을 참여시키나. 그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내가 우겼어. 이제는 고인이 된 김창근 민추협 상임운영 위원을 통해 참여하도록 권유했는데 일단 동의를 받았어. 그런데 막상 민추협 결성 단계가 되니까 이 사람이 일언반구 말도 없이 미국으로 날아가 버린 기라. 가면 간다고 말이나 하고 떠날 일이지. 그런 식으로 떠나 버리는 데가 어데 있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는 김종필 총재에 대해 깊은 불신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누구를 불신하든, 그리고 그 불신의 결과가 어떻든 유권자들은 아무것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