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해서 받았더니 평소 가깝게 지내던 박철언 정책보좌관이었다. 그때 박 보좌관의 말이 ‘각하의 지시로 전화했다. 지금 당장 항공사에 연락해서 서울행 2시 비행기에 좌석을 예약 하라. 도쿄에서 서울까지는 약 2시간 반쯤 걸리니까 김포공항에 4시 반쯤 도착한다고 보고 늦어도 6시까지는 청와대 현관에 도착하라는 각하의 명령이다.’
그래서 지시대로 6시 안에 청와대 현관 아닌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했다. 여기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비로소 정치권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박준병 의원의 대화 내용이다. “박 장군, 아니 박 의원.” “예.” “내가 박 의원을 급히 돌아 오라칸 거는 시방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일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야.”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입니까.” “정계개편, 3당 합당 말이야.” “3당 합당이라면….”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말이야.”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민정당 박준병 의원이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서 급히 돌아온 것은 그해 89년 7월이다.
그리고 박철언 정책보좌관과 함께 통일민주당과의 합당 교섭에 참여한 것은 8월,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시간적으로 이때는 양당의 합당 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와 있을 때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박 의원을 추가로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해답을 통일민주당 황병태 정책위의장으로부터 들어 보자.
“박준병 의원은 어땠는지 몰라도 내 경우는 솔직히 겁이 났다. 무엇이 겁이 났느냐. 처음 김영삼 총재로부터 특명을 받고 물밑 교섭에 들어갔을 때는 물론 그런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막상 합당을 위한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는데 우리(황병태 의원 자신과 박철언 정책보좌관)가 시방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3당 합당, 물론 그때는 3당이 아니라 양당 합당이지만 그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정치판은 물론이고 국민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만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냐. 다시 말해서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것이냐 아니만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고 욕을 먹을 것이냐. 이런 생각 때문에 겁이 난 것이다. 그래서 김영삼 총재에게 누구 한 사람 더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그래서 들어온 사람이 김덕룡 의원이었다.” 부연하면 그렇다.
처음엔 몰랐지만 합당 교섭 마무리 단계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엄청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겁을 먹고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내용의 서로 다른 진술이 있다. 박철언 당시 정책보좌관이다. “사실 그 3당 통합이 이루어지기까지 김영삼 총재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이면서 황병태 의원과 함께 김덕룡 의원까지도 합당 논의의 파트너로서 지정해 주었다.” “국민들이 어떻게 평가할까” 이상 두 사람의 진술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황병태 의원은 사안의 중대성에 겁이 나서 협상 대표를 한 사람 더 추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반면에 박철언 의원은 가신 그룹이 즐비한 통일민주당과의 협상에 황병태 의원 한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바로 이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은 과연 무슨뜻이었을까. 박철언 의원 자신의 간접 진술로 들어 보자. “그 대목은 내각책임제 개헌과 연계가 된다. 3당 합당의 전제 조건이 내각책임제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통일민주당쪽에서도 처음에는 원칙적으로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꾸만 태도가 이상해졌다. 그래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문서화해서 서명을 받기로 했는데 황병태 의원의 서명만 가지고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속력이 약해서 자칫하면 YS가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 딴소리를 못하도록 YS를 대리해서 서명할 수 있는 측근 중의 최측근을 협상 대표로 추가해 주도록 요구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통일민주당측은 협상을 마무리할 대표를 확정했다. 반면에 민주정의당, 민정당측은 어떻게 되고 있었나.
다시 노태우 대통령과 박준병 의원의 대화. “각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 여권에서 엄청난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하고 저한테 급히 돌아오라고 한 것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박 장군, 박 의원. 갑자기 돌아와서 얘길 들으니까 상황 판단이 잘 안되겠지만 박 의원이 맡아줘야 할 중대한 임무가 있어요.” “어떤 임뭅니까.” ‘내각제는 합당 위한 방편’ “박철언 정무 정관을 도와서 3당 합당에 따르는 여러 가지 절차 문제. 특히 그중에서도 3당 합당의 전제가 되는 내각책임제 개헌문제를 반드시 성사시키는 일이오.” ‘내각책임제 개헌을 성사시켜라.’ 지상 과제였다.
3당 합당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분명히 내각책임제 개헌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서가 작성되었고 그 내용을 제1항에 명기했다. 그럼에도 통일민주당측은, YS는 각서에 명기된 합의내용을 부인함으로써 양당간의 갈등의 소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내용의 각서가, 3당간에 합의된 각서에그런 내용이 과연 명기돼 있었는가.
▲ 합당을 논의하고 있는 민주당 김덕룡의원(왼쪽) 과 황병태 의원(가운데) | ||
“3당 합당을 위한 협상 과정에 내각책임제 개헌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논의가 있었고 합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논의했고 합의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각책임제에 대한 YS의 근본적인 시각이었다. 박철언 정책보좌관, 나중에 정무장관이다.
그쪽에서 집요하게 요구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합의하도록 지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각책임제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합당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 진심으로 내각책임제를 수용할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YS가 내각책임제를 어떻게 해서 논의하고 합의하는 것을 허락했느냐….”
진술자가 바뀐다. 정계 원로 C옹이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다. YS가 그때 왜 합의한 내각책임제를 뒤집었느냐. 아니 그보다 애당초 무슨 생각으로 내각제를 받아들였느냐. 3당 합당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아니지 그때는 3당이 아니라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양당 합당인데, 이 과정에서 내각제 개헌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논의만 있었던 게 아니다.
YS가 대통령이 돼서 집권을 하면 내각책임제를 한다 하는 합의가 있었고 이것을 각서로 해서 각당 협상 대표들이 도장까지 찍었는데 그래놓고 YS가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거 모른다.’ 이래서 정치판의 신의 문제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모든 증언 진술이 그렇다. 3당 통합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 대전제가 있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이 부분 3당 총재들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합의를 도출했다. 뿐만 아니라 구두 약속만으로는 믿을 수가 없어서 각서를 작성했으며 서명 날인까지 받은 것이다. 의문은 여기서 제기된다. 3당 합당 과정에서 있었던 최대의 의문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철두철미 대통령 중심제 신봉자인 YS가 그때 왜 내각책임제를 받아들였는가. 다시 정계 원로 C옹의 진술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이미 김영삼 총재는 확고한 신념이 서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합당해서 여당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당의 대전제인 내각책임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되는 데 못할 일이 무엇이이냐.”
결국 90년 1월의 정계개편 및 3당 합당은 ‘정치적 사고’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여기서 3당 합당을 정치적 사고로 표현하는 것은 결과를 기준으로 한 모든 평가가 부정적인 데서 연유한다. 결과뿐 아니라 그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이제 정계개편 3당 합당의 마무리 작업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그 시점에서 3당 합당이 왜 필요했는가. 사고 발생의 원인부터 확인해 보자. 황병태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이다.
“87년과 88년 YS에게는 두 가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 그리고 다른 하나는 4•26총선에서의 제2야당으로의 전락이다. 이 두 가지 사건 중에 어느 쪽이 더 충격이 컸느냐. 88년 4•26총선 결과였던 것이다. 대통령 후보 문제로 당을 깨고 나간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패배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것이다.”
당시의 몇몇 진술을 종합해 보면 YS는 87년 대선에 대통령이 될 준비 없이 선거에 임한 것이 된다. DJ는 끝까지 색깔 지켰다 뒤집어 말하면 대선 승리를 위한 확신은 고사하고 여건조차 갖추지 못한 채 출마하여 국민민을 우롱한 것이다. 이처럼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YS와는 달리 DJ 김대중 총재는 정계 개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입장을 확인해 보자.
“의도는 좋다. 취지도 좋다. 뿐만 아니라 영호남간의 지역 감정을 타파하는 문제는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아주 적절하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위해 나 김대중이가 여당과 제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40년에 가까운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투쟁의 역사가 용서하질 않는다. 대신 나가 약속을 하겠다. 앞으로 계속해서 제1야당의 자리를 지키되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합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여소야대 정국하에서 집권 초반기의 권력 기반 확보와 퇴임 후의 안전을 위한 준비가 절실했던 것이다. 또한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을 통해 집권의 꿈을 이루기 위해 3당 합당이 필요했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는 군사정권의 맥을 끊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키자는 목표에서 고심 끝에 3당 합당을 결심한 것이다. 다만, 김대중 총재는 자신의 색깔을 끝까지 분명히 한 것이다. 앞으로 한 세대 정도가 지나가면 3당 합당은 새롭게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