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 초 겨울의 찬바람 속에 5공의 실세들이 하나둘씩 스러져 갔다. 백담사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사진)는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 ||
두 사람은 97년 대선에서는 서로 맞은편에 서 있던 관계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 기반이 영남권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박태준 전 총리의 영향권도 영남권이다. 이회창 후보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영남권 표심의 이탈을 미연에 방지해 보려는 계산이고, 박 전 총리 입장에선 총리 자리에서 석연치 않게 물러나게 한 민주당을 지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의 만남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논의는 어떻게 결론이 날 것인가. 과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여론 조사상의 지지율과 당선 가능성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지. 어쨌든 단일화가 이루질 경우 이회창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어낸 양 진영은 오차 범위 내에서 각축을 벌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소위 군소 후보 중에서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약진을 나타내고 있다. 장 전 안기부장의 출마와 관련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사전 조율 여부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모이고 있다.
88년 말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각하, 장세동입니다. 상황이 급해서 용건부터 말씀 올리겠습니다. 6공 검찰이 극비리에 저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영장이 발부될 것이라는 보고도 받았습니다. 따라서 며칠 내에 영장이 집행될 것인데 제가 취할 수 있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순응해서 구속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5공과 6공의 관계를 사실 그대로 세상에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5•6공이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이 나라 정치판은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제가 취할 방법은 과연 어떤 방법인지 급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편지를 구겨버리자 이순자씨가 물었다. “아니 장 부장이 편지에 뭐라고 했어요?” “믿을 수가 없구만. 안현태, 아니 윤 서방, 장세동이가 이 편질 언제 가져왔나? 직접 가져왔나?” 연희동 집을 지키고 있던 전 전 대통령의 사위 윤상현씨다. “예. 장 부장이 직접 연희동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영장이 발부됐으만 미행이 붙었을 긴데….” “노태우한테 또 속았다구”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끼어 들었다.
“미행은 벌써부터 붙어 있었습니다. 어르신네.” 이순자씨가 안현태 전 실장에게 물었다. “미행을 어디서 붙여요? 검찰에서 붙였어요?” “어디서 붙였든 그런 것이 문제겠습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핵심을 물었다. “윤 서방이 말해 봐라. 장세동이가 집으로 찾아와서 뭐라고 하면서 편지를 주더나?” “자신은 미행이 붙어서 백담사까지는 갈 수가 없다.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나와 있는 보안사 요원들이 통과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윤상현씨 당신은 얼굴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보안사에서 통과시키지 않을 이유도 없을 테니 내 대신 편지를 급히 좀 어르신께 전해 달라. 이런 부탁이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뒤섞인 안색으로 모두를 물렸다. “다들 좀 나가 있거라. 내가 세동이한테 편지를 써야겠다.” “장 부장한테 편지를 쓰는데 우리가 왜 나가 있어요?” “나가시죠. 장모님” 사위에게 이끌려 나가는 이순자씨가 한마디 덧붙였다.
“또 속았어요 당신이. 노태우한테 또 속았다구요!” 3당 합당의 사전 작업으로서 89년 정계개편이 한창 진행중일 때 노태우 대통령의 관심은 정호용 의원 처리 문제에 모아져 있었다. 그 즈음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정호용 의원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던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정 의원을 찾아 왔다.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정 의원은 김용갑 장관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술병을 꺼내왔다. “자, 들지.” “형님 이기 뭡니까?” “몰라서 묻나. 미국 술 아니야.” “미국 술이라카는 거는 지도 압니다만 밖에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이래도 됩니까?” “누가 할 소릴 누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리케 말하는 김 장관은 여기 뭐하러 왔노. 공무원이 근무 시간에 근무 안하고 나 같은 사람 찾아다녀도 되는 기야.” 나 같은 사람이란 5공 청산의 핵심 인물로 꼽히고 있는 것을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라니, 형님이 뭐 어때서 그라요?” “이 사람이 뭐 자꾸만 따지고 있어. 마실 끼가 안 마실 끼가.” “좋십니다. 마시지예. 대신 이 김용갑이 앞날을 위해 건배 하셔야 됩니데이.” “김용갑이야 장관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앞날이 뭐 어때서….” 김용갑 장관은 정호용 의원을 잠시 쳐다보았다. “참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뭐 어째?” “김용갑이가 실직자 안됐습니까. 선배라는 분이 그런 것도 모르고 뭐하고 있습니까?” “그러만 니가 사표냈다는 기 참말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호용 의원이 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이 정호용이가 니 말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쑥맥인줄 알아. 내가 누고 정호용이 아이가 정호용이….” 정호용, 그는 누구인가. 89년 3월 그는 왜 5공 청산의 표적이 되어 거대 야당의 몰아내기 작전에 걸려들었으며 마침내 여권의 밀어내기에 휘말렸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색다른 증언이 있다. 89년 11월 광주사태 청문회에서 정호용 의원을 신문했던 통일민주당 김광일 의원의 신문 내용이다. 청문회 장면이다. “증인은 자신의 저서 <용병의 운영과 실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휘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모든 지휘관은 이를 경건하게 받아들여 엄정하게 행사해야 한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좋습니다. 신문하겠습니다. 7공수 전투 상보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소요 진압에 특전 부대를 직접 투입하는 것은 신중한 고려 끝에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런 건의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태 당시 시위대가 과격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계엄군의 초기 진압이 지나치게 강경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증인은 이 점 동의합니까.” “계엄군이 진압 작전을 과격하게 펼친 잘못도 있습니다. 반면에 예비군 무기고를 파괴해서 무장을 하고 계엄군에 대항한 시위대도 잘못은 있습니다.”
▲ 왼쪽부터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호용 전 의원, 이학봉 전 청와대 민정수석 | ||
정호용 “광주진압 나는 몰라” 이에 정호용 의원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수긍이 간다고 했다. 그때까지 정호용 의원은 다른 의원들의 신문에 대해 군을 너무 모른다며 꾸짖듯 답변했다. 그러다가 민주당 김광일 위원이 하나 하나 논거를 들이대며 신문하자 ‘모른다’는 대답은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은 못했다.
그러자 김 위원은 사태 당시 정호용 장군의 광주 체류기간을 문제삼아 따지고 들었다. 계속되는 김광일 위원의 질문. “10•26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첫째 사건 현장 부근에, 둘째 그것도 잠시, 셋째 김재규 부장의 초청을 받고 명분 있게 현장에 갔으며, 넷째 10•26으로 인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불과 몇 사람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과하고 징역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증인은 광주 현장에 내려가 첫째 진압 부대 지휘 본부에 체류했으며, 둘째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사태가 진행되는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체류했으며, 셋째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려갔으며, 다섯째 광주사태로 인해서는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래도 증인은 부대를 넘겨주었을 뿐이다, 직접 지휘한 일이 없으니 책임이 없다, 이렇게 계속해서 주장하겠습니까.”
다시 김용갑 장관과 정호용 의원의 대낮 술자리로 돌아가자. “이 무신 허튼 수작이고? 김용갑이.” 정호용 의원이 호통을 쳤다. “무신 말씀입니까.” “니 참말이가. 니가 총무처 장관 사표 냈다는 기 참말이가 말이야. 다 쇼 아니야 쇼!” 김용갑 장관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쇼라? 아니 그기 지금 무신 말입니까.” “아니만 니가 무엇 때문에 사표를 내나. 여야가 한통속이 돼가 나를 몰아낼라카는데 니가 무엇 때문에 총무처 장관을 그만두나 말이야.”
김용갑 장관의 얼굴이 딱하다는 표정에서 화난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니 형님, 여태까지 이 김용갑이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왔십니까. 좋십니다. 그렇다면 경과를 말씀드리지요. 아침에 홍성철 비서실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김용갑 장관과 홍성철 비서실장의 통화 내용을 보자. “나, 비서실장 홍성철입네다. 내가 지금 삼청동 안가에 와 있는데 김 장관하고 상의할 일이 있습네다. 중요한 사안이니까 지금 당장 와주셨으면 고맙겠습네다.”
김용갑 장관이 홍성철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갔을 때는 이미 최창윤 정무수석과 박세직 안기부장이 도착해 있었다. 당시 김용갑 장관은 정호용 의원 처리를 둘러싼 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그런 논의 자체가 노태우 대통령의 뜻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홍성철 비서실장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아봐야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말렸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던 정호용 의원이 전화기를 들었다. “어데다 전화를 할라고 그럽니까.” “어데긴 어데야. 노태우지.” “참 형님도. 지금 그 사람이 시방 형님 전화를 받을 리가 있습니까.” 경악하는 전두환 한편 89년 초 무렵만 해도 백담사에 전해 오는 서울 소식은 전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1월12일 5공 청와대 이학봉 민정수석이 구속되었다.
잇달아 보름 뒤인 27일 전두환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집행되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6공 검찰의 사법 처리가 백담사의 전 전 대통령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S대령의 진술은 다음호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