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록은 동색 89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중 간평가 준비팀을 꾸린다. 하지만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보혁구도로의 개편을 주장하며, 중간평가를 그만두게 하고 비밀리에 공화당과 민정당의 합당을 진행시킨다. | ||
노무현 정권은 지금 갈 길이 바쁘다. 김대중 정부의 부채와 자산을 승계하고 있는 중이다. 부채는 빨리 정리하고 싶을 것이고, 자산은 되도록이면 크게 해서 받고 싶을 것이다. 여소야대 정국을 헤쳐나갈 묘안 찾기에 한창이다. 일단은 고건 총리 카드를 내세워 안정 보수층을 끌어안겠다는 복안을 밝힌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정 의석’ 확보가 급선무다. 각종 민생 현안과 관련있는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하고 개혁 드라이브를 뒷받침할 법적 제도적 장치도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주목되는 움직임이 바로 정계 개편이다. 지금의 여소야대 정국은 6공 노태우 정권 초기 상황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88년 4•26총선으로 여소야대의 4당 체제가 형성될 적에 JP(김종필)의 공화당은 제 4당이자 거대 3야당 중에서는 제 3당, 최소의 정당으로 등장했다. 다음은 6공 청와대 L비서관의 진술.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야 3당의 입장, 그중에서 JP 공화당의 입장에 대한 증언이다.
“JP의 내각제 발상이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때 그의 구상은 보수•혁신의 정계 개편과 내각제 개헌이었다. 4•26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면서 그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그런 주장은 당시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어가던 양 김씨, 즉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민주당 김영삼 총재, 이 두 사람과의 서로 다른 정견에서 비롯됐다.
야권 공조를 위한 3김 회담을 제의해서 성사시킨 JP는 이 회담에서 3야당 공조에 합의하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속마음은 그렇질 않았다. 우선 체질 자체가 여당 체질인 데다 양 김씨보다 훨씬 보수적인 데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 항쟁이나 5공 청산과 관련한 김대중 김영삼 양 총재의 완고한 태도에 이질감을 느꼈고 특히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 등에 있어서는 완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L비서관의 진술은 여기서부터 더욱 구체적이다. “JP의 거부감은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보다도 이념적으로 한발 앞서 있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 대해 더욱 강력했다. 이 같은 거부감이 표면화된 것은 그 해 88년 5월18일 야 3당 총재 회담 직후에 나온 김대중 총재의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제의’에서였는데 그때 DJ는 평민당 비공개 의원 총회에서 이런 제의를 했다.”
그 내용이다. “서울올림픽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적으로 영광이요 명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특이한 상황이 있다. 남북 분단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제의한다. 올림픽을 올림픽 그 자체로 끝나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이용하여 남북 통일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올림픽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며 필요하다면 판문점에서 남북 정당간의 회담을 열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L비서관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JP의 측근 중 최측근이었던 김용환 의원의 얘기다. “당시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및 판문점에서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가 나오자 김종필 총재는 논평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발언을 하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판문점에서 남북간 정상회담을 열자는 제의에 나는 반대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저쪽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마는 결과가 될 우려가 있어서 그렇다. 자, 그렇다면 남북 문제는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것이냐. 아직은 대북 창구를 정부 주관 하에 두고 우리 야 3당은 정부 방침에 협조하는 것이 옳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계속되는 김용환 의원의 진술. “김종필 총재가 처음으로 자신의 구상을 표면화시킨 것은 그 해 88년 6월 6개국 대사 초청 오찬의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그분은 이런 말로써 야 3당의 색깔을 분류하고 보수 연합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김종필 총재의 언급 내용이다. “흔히 야 3당 협조 체제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3야당은 각각 색깔이 다르다. 평민당이 혁신적인 데 반해 우리 공화당은 온건 보수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은 평민과 공화의 중간쯤 되는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이렇게 본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의 정치 판도는 보수와 혁신의 양당 구조로 가게 될 소지가 충분하다, 나는 이렇게 보고 있다.”
보수 진영의 위기감, 즉 여소야대 정국에서 혁신의 소리는 점차 높아지는데 보수 진영은 민정당과 공화당으로 분할돼 있어서 갈수록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 김 총재의 생각이었다.” 88년 7월29일 JP 김종필은 광주 문제와 관련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고질적인 지역감정과 관련된 발언이다.
김종필 총재의 발언이다. “지역감정에 관한 한 어느 한 정당에서 잘못 나서면 오히려 사태가 악화될 위험이 있다. 특히 어느 특정 정치인이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유아독존적인 발상을 한다면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위험이 있다.” JP는 그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 DJ, 김대중 총재에 대한 비판의 발언이었던 것이다. 진술은 그렇다.
중간평가는 애당초 제 1야당인 평민당에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쪽으로 당론을 제시했다. 따라서 민정당은 평민당의 당론을 받아들이고 중간평가는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5공 청산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평민당측 협상 창구였던 김원기 원내총무의 진술은 또 다르다.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5공 청산을 위한 여러 가지 반대 급부, 즉 지자제 실시 등을 받아냈다는 주장인 것이다.
과연 어느 쪽 진술이 옳은가. 그것은 일단 뒤로 미루고 그 해 89년 3월19일의 현장으로 가보자.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이다. “나가 오늘 이라케 청와대 핵심들을 들어오라 한 거는 다른 기 아닙니다. 우리 김윤환 원내총무가 오늘 중간평가 문제 그라고 5공 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평민당 김원기 총무하고 마지막 협상을 시도하기로 되가 있십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먼저 확정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들어오라 한 깁니다.” “각하, 무신 말씀입니까?”
김윤환 원내 총무. “그러만 두 가지 문제에 변경이 생겼다는 말씀입니까?” “안그래도 나가 그 말을 할라고 했십니다. 여러분 나는 중간평가를 받지 않기로 결심했십니다.” 89년 3월20일 노태우 대통령은 마침내 중간평가 유보를 공식 선언했다. 87년 대선 기간 중에 자기 자신이 제시한 국민과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한 것이다. 왜 그랬는가. 계속해서 그 진상을 확인해 보자.
S대령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위한 대책 기구를 이중으로 설치하고 당에 대해서는 핵심 당원들에게 중간평가에 대비한 연수 교육을 시키도록 지시해서 당 지도부가 교육에 착수했던 그런 시점이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은 왜 갑자기 중간평가 유보 선언을 해버렸느냐. 89년 3월7일 노태우 김종필의 양자 영수 회담이 있었던 사실은 그 이후에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회담을 마치고 당사로 돌아온 김 총재는 정책위 의장 김용환 의원을 불러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여기서 진술자가 바뀐다. 6공 청와대 L비서관이다. 진술에 앞서 우선 6공 정권의 중간평가에 대한 3야당의 입장부터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JP 김종필의 공화당 입장이다. “그 해 89년 3월7일 노태우 대통령은 정국 안정책의 일환으로 김종필 총재를 청와대로 불러 민정 공화 양당의 영수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 의제는 양당의 합당이었다.”
김용환 의장이 물었다. “양당이 합친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민정당과의 정책 연합입니까 아니면 양당의 합당입니까?” 김종필 총재의 부연 설명이다. “양당의 정책 연합이 아니오. 당과 당이 합치는 거예요.” 김용환 의원은 놀란 표정으로 김 총재를 한참 쳐다보았다. 김 의원의 진술이다.
“그보다 앞서 88년 8월, 정확히는 8월22일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야 3당 총재와 연쇄 개별 영수 회담을 시도했을 적에 첫 번째 상대가 된 JP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민정당은 너무 약한 것 같습니다. 여소야대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그래야 할 이유가 대체 뭡니까. 어쨌든 이대로는 안됩니다. 정치판을 보곀?구도로 재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당의 진의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중간평가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없다기보다 여권에서 하기 어렵다고 보면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평민, 민주 양당이 제동을 걸고 나오더라도 미력하나마 우리 공화당은 각하를 돕겠습니다.’
다시 김용환 의원의 진술이다. “이때부터 노태우 대통령과 JP 사이에 물밑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의 내용은 물론 보•혁 구도의 정계 개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당과 당의 합당까지는 얘기가 안되고 정책 연합선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해가 바뀌어 89년 3월7일 또 한 번의 영수 회담에서 JP와 노태우 대통령 사이에 우리 공화당과 민정당의 합당, 즉 보혁구도의 정계개편에 합의가 된 것이다.”
다시 김종필 총재와 김용환 의원 사이의 대화로 돌아가자. “김 의장. 내가 말하는 합치기로 했다는 말은 정책 연합이 아니라 합당이에요, 합당.” “합당이라면 저도 반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선행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입니까?” 김종필 총재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우선 제일 먼저 해결할 문제가 5공 청산입니다. 이것이 안되고는 보•혁 구도의 개편에 명분이 없어요. 그래서 애긴데….” 당시 김종필 총재는 김용환 정책위의장에게 중책을 맡기게 되는데 과연 어떤 임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