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받는 DJ. 당시 그는 사형을 당할 위기에서 감찰관의 꼬임에 넘어가 내란음모를 시인 했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훗날 “그를 사형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 ||
89년 3월7일 또 한 번의 영수회담에서 JP(김종필)와 노태우 대통령 사이에 공화당과 민정당의 합당 즉 보혁구도의 정계 개편이 합의된다. S대령의 진술이다. “그때 JP는 측근 중의 최측근 김용환 정책위의장에게 중책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선 제일 먼저 해결할 문제가 5공 청산이다. 이것이 안되고는 보혁 구도의 개편에 명분이 없다. 앞으로의 문제는 5공 청산인데, 이 문제를 민정당 하고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하는데 노태우 대통령이나 나는 이목이 있으니 자주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저쪽하고 합의를 봐서 우리 쪽에서는 김 의장이 협상 대표가 되고 저쪽에서는 홍성철 비서실장을 내세우기로 양해가 됐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김 의장이 홍성철 실장하고 자주 접촉해서 양당의 합당 문제를 풀어 나가도록 하라. 그리고 또 하나는 시방 한창 논쟁이 되고 있는 중간평가인데 이건 하지 않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도록 하라’.”
이 즈음 김대중 평민당 총재도 김원기 원내총무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나가 시방 김 총무에게 지시하는 것은 그러니까 민정당의 김윤환 총무하고 마지막 담판을 지을 적에 중간평가 때문에 고심할 것은 없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윤환 총무하고 담판을 벌일 적에 중간평가를 받도록 강요하지는 마라 이런 말씀이고, 결국은 중간평가를 안 한다는 것을 담보로 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내자는 얘기다.”
당시 김대중 총재가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지방자치제의 조기 실시였다. 김대중 총재의 언급 내용이다. “5공 청산, 여기엔 우리가 지목하고 있는 5공 핵심들 특히 정호용이 처벌 문제하고 전두환의 청문회 출석 증언 등이 포함되는데, 여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이 지방자치제다. 광주문제보다도 앞서는 것이 바로 지방자치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다 놓치더라도 지방자치제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반드시 얻어내야 한다.”
우리는 지금 3당 합당을 전후한 보혁구도로의 정계개편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구욱서 부장판사)는 시인 고은씨(69)가 “지난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신군부의 판결은 부당하다”며 제기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청구인은 80년 헌정질서 파괴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긴 했으나 12/12사태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전 대통령 등에 대한 내란죄가 유죄로 확정된 만큼 5/18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정한 특별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전봉진 부장판사)도 지난해 11월 고 문익환 목사 유족 등 19명이 같은 취지로 낸 재심청구를 받아들인 바 있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재심을 받는 사람은 모두 20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여기서 잠시 80년 신군부의 정치실험 당시 김대중 총재와 신군부와의 만남에 대한 일화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생 동지 이희호 여사가 허화평 정무수석의 호출을 받고 경복궁 미술관 앞에 내렸다. 이 여사의 귓가에 남아 있는 허화평 정무수석의 목소리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경복궁 미술관 아시지요. 그 앞으로 오시면 정 비서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낍니다. 거기서부터는 그 사람의 말대로 따르기만 하시면 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낍니다.” 목소리는 남아 있지만 정 비서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이희호 여사를 알아본 사내가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이희호 여사지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는 이희호 여사의 눈이 커졌다. “예. 그런데 누구시지요.” “아,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제가 바로 정 비섭니다.” “그, 그렇군요.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시간이 됐는데 안 오시길래 일이 잘못됐나 해서 걱정했습니다. 자, 타시지요.” “그런데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왜 두려우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약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디로 모셔 간다는 말씀은 드릴 수가 없지만 이 여사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곳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라뇨? 그런 곳이 어디죠?” “말씀 안하셔도 다 압니다. 이 여사께서는 지금 내가 혹시 안기부 같은 곳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이희호 여사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안기부를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 한때 죽이려는 자와 죽는 자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지난 2000년 청와대 만찬을 함께한 두 사람. | ||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증언이다. “저녁때가 다 돼서였는데 거리는 벌써 캄캄했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인 경복궁 미술관 앞으로 갔더니 정 비서라는 사람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까 효자동이더라. 비로소 알게 됐다. 허화평이라는 사람이 정무수석이라고 하더니 청와대로 가는구나. 승용차가 청와대 정문으로 들어섰다. 조그만 다리를 지났다. 그리고 마치 오두막집처럼 생긴 집 앞에서 차가 멈췄다.”
여기서 진술과 증언이 필요하다. 80년 9월17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조종하는 계엄 군법회의는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DJ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어 2심 군사 재판은 짜여진 각본대로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81년 1월23일 대법원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김대중은 사형이 확정된 것이다.
이때 전두환의 진심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선고대로 집행할 생각이었는가. 아니면 선고 직후 국무회의를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듯이 죽이지는 않을 생각이었는가.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증언이다. “남산 지하실에서 보니까 내란선동죄로는 죽질 않았다. 사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민통과 관련시켜서 국가보안법 1조 1항으로 걸면 사형이다. 싫어도 사형을 선고하도록 돼 있었다. 법이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런 것을 모르고 참 어리석고 부끄럽게도 무기징역이라도 좋으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검찰관의 꼬임에 빠진 것이다. 그때 담당 검찰관이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안법은 말도 안된다. 책임지고 국가보안법은 적용 안할 것이니 다른 부분은 시인해라. 만일 여기서 부인하면 또 한 번 남산으로 돌아가서 당해야 한다. 그런 것보다는 일단 시인하고 법정에 가서 할 말을 하면 될 것 아니냐. 책임지고 국가보안법으로는 걸지 않겠다. 시인해라.’
나는 그때 검찰에서 진술한 것은 증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검찰관 말대로 법정에 가서 얘기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시인한 것이다. 그게 바로 함정이었다.” 이상의 진술은 김대중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어떤가. 이 부분에 대해 그는 어떻게 진술하고 있는가. 87년 12월 전두환은 <월간조선>과의 옥중 인터뷰에서 이 부분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기자의 질문. “81년 1월23일 김대중씨는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형이 확정되자 국무회의는 1등급 감형하여 무기징역으로 형량을 낮추었다. 그때 김대중에 대한 감형은 언제부터 논의가 되었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답변. “80년 초 김대중씨를 만나 시국과 관련하여 협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재판에서 증언했다시피 3명의 정치 지도자(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김종필의 이른바 3김씨를 가리킨다)가 있는데 보안사령관이 김대중씨 한 사람만 만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그 뒤에 김대중씨는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어 재판을 받았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할까 생각도 했으나 내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계속 진행된 재판에 대해 나는 한마디도 이래라 저래라 한 일이 없다. 판결은 재판부에서 알아서 해라. 재판 결과가 나온 뒤에 내가 알아서 하면 될 거 아니냐, 나는 이런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김대중씨 사형은 절대로 안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마당에 어떻게 나라의 정치 지도자 김대중씨의 사형 집행서에 서명할 수 있겠는가.
그거는 나의 소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이 나자마자 무기 형으로 감형되고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면하여 미국에 가서 신병을 치료하고 돌아오도록 허락한 것이다.” 과연 그랬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다시 이희호 여사의 진술로 돌아가자.
정 비서에 의해 안내된 이희호 여사가 허화평 정무수석의 방으로 들어섰다. 허화평 수석은 보이지 않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조금 후에 허 정무수석이 들어왔다. “아, 오셨군요. 아닙니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자신을 보고 일어서려는 이희호 여사를 허 정무수석이 만류하며 재빨리 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이 여사께서 만나고 싶어하는 분께서 들어오실 낍니다. 참 여기가 어딘지 아셨습니까?” “청와대로 알고 들어왔는데….” “맞습니다. 청와댑니다. 자 그럼 저는 나가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들어오시면 만나 보십시오.” 이희호 여사의 증언이다. “오두막집 같은 데서 잠시 기다리니까 허화평 정무수석이 들어 왔다. 잠시 애기를 나누고 허 정무수석이 나가고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자 허화평 정무수석이 말한,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 들어왔다.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전두환입니다.” 껄껄 웃으며 들어오는 전두환 대통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