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년 연말 김윤환 당시 민정당 원내총무와 노 태우 대통령은 정계개편을 논의한다. 당시 자신 의 우유부단함을 지적하는 김윤환에게 노태우는 웃음과 함께 정계개편 청사진을 요구한다. | ||
‘의혹 정국’의 해법을 놓고 정치권의 이해가 첨예하게 상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년 총선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이라는 화두로 총선을 대비하고 있는 노무현 당선자와 민주당에게 이번 사건은 하루 빨리 털어버려야 할 구 정권의 유물이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에겐 대선 패배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쥘 수 있는 호재요, 사분오열된 당 전열을 재정비해 총선에 대비할 수 있는 천운의 기회인 셈이다.
특검제 도입, 총리 인사청문회 등과 관련해 원내 다수당인 한나라당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인 노 당선자와 민주당으로선 ‘여소야대’ 구도가 버겹게 느껴질 만도 하다. 최근 다시 정가 일각에서 정계개편설이 솔솔 흘러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의 정치권 새 판 짜기를 개혁과 보수, 양대 세력의 재편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과연 14년 전 노태우 정권이 여소야대 구도의 타개책으로 삼았던 정계개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정계개편의 서막을 연 것은 바로 노태우 정권의 공약, 중간평가를 둘러싼 정국의 소용돌이였다. 지금 우리는 89년 3월 6공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야 3당의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JP(김종필)의 공화당 입장은 확인되었다. ‘중간평가 불가’.
반면에 제1야당인 평민당의 입장은 중간평가를 유보하되 이것을 ‘볼모’로 보다 많은 것을 얻어낸다는 입장이었다. 먼저 평민당 원내총무, 현 민주당 고문 김원기 의원의 증언이다.
“민정당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야당인 것은 어떻게 견뎌 보겠는데 작은 여당이 돼가지고 일일이 야당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말해서 여소야대 국면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김원기 민주당 고문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정몽준 후보 단일화 협상에 필적할 만한 기억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여소야대 시절인 1989년에 제1야당인 평민당 원내총무로서 민정당과 중간평가, 5공청산 등을 놓고 벌인 협상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5공청문회, 광주청문회 등 이른바 ‘청문회 정국’ 막바지에서 여야간에 대협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내가 그 역사적인 문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평민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나 그리고 한두 사람쯤이고, 그때 민정당에서도 노태우 대통령과 당시 김윤환 원내총무 그리고 박철언 의원 정도다.
나하고 김윤환 총무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협상을 했다. 중간평가와 광주문제에 걸려 있던 정호용씨를 비롯해서 이희성씨 등과 5·18 때 광주에 출동했던 부대장들이라든지 5공 비리에 연루됐던 당시 ‘금융계의 황제’라고 했던 이원조 의원이라든지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처리 문제와 광주 문제 처리, 전두환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논의하는 일대 협상이 있었다. 중간평가를 연기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다시 기자의 질문.
“중간평가와 광주, 5공 비리 문제를 일괄 타결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일괄 타결을 했다. 나하고 김윤환 의원이.”
“그렇다면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공화당은 배제한 상태에서 평민당과 민정당 두 당만 협상을 한 것인가.”
“주로 우리하고만 했다. 나와 김윤환 의원이 합의한 서류가 있다. 물론 나는 당시 김대중 총재에게 보고했고, 민정당을 대표해서 김윤환, 평민당을 대표해서 김원기, 이렇게 여러 장으로 된 합의문서가 있다.
“아직 공개가 안된 것인가.”
“그렇다.”
“언제쯤 공개할 것인가.”
“이제 공개해도 상관이 없는데…, 사실은 서경원 사건 등으로 공안정국이 형성되고 3당 야합 구도가 발생하고 그러한 역경이 있을 때 그 내용을 공개해서 ‘너희들이 협약을 하고 이 따위 짓거리를 할 수가 있느냐’하는 공격 자료로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공개는 안 했다. 사실 공개하고 싶은 유혹은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공개함으로써 민정계 내부의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살생부였으니까. 누구는 배지 떼고 누구누구는 어떻게 처리하고, 축출하고 하는 문제까지 사인을 한 거니까. 그것을 공개하면 자기들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나는데, 그러나 그때 그것을 영원히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 곤란을 당하면서도 공개를 안했다. 그래서 민정당이나 야당쪽에서 나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도 그런 것이 작용한다고 본다.”
결국 중간평가 유보를 놓고 뒷거래를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민정당이 중간평가 문제 등으로 물밑접촉을 했던 대상은 평민당만이 아니었다. 당시 김원기 원내총무의 상대역이었던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의 진술을 들어보자.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하고의 물밑 대화는 그 해 89년 1월 초순께부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1월22일인가 그 달 하순께 상도동이 아니고 김현철이 집에서 만나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협상을 하게 되는데 그때의 경과는 이렇다.”
▲ 정계개편에 즈음해 평민당은 민정당이 자신들과 단독 협상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김윤환 총무는 민주당 과도 물밑협상을 진행했다. 위쪽 사진은 DJ와 김윤환, 아래쪽은 YS와 김윤환. | ||
“안녕하십니까. 김윤환입니다.”
“김윤환이라카는 거는 알고 있는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에요. 아직도 내한테 할 얘기가 남았습니까?”
옆에 있던 최형우 의원이 귀엣말로 물었다
“총재 어른, 김 총무가 뭐라고 합니까?”
김영삼 총재가 짜증을 냈다.
“가만 좀 있어 봐라. 통화중에 그러만 우짜노.”
겸연쩍은 듯 최형우 의원이 소리를 죽였다.
“미안십니다. 계속하이소.”
“보소 김 총무, 내 말 듣고 있지요.”
“예. 듣고 있습니다.”
“난 또 이 전화가, 전화를 도청하는 사람들이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그라만 요새도 총재 어른 전화를 도청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거는 내가 김 총무에게 묻고 싶은 말이네. 요새도 안기부나 보안사 아니면 치안본부 특수부 같은 데서 우리 집 전화를 도청하고 있지요. 그렇지요?”
민망한 듯 웃음으로 피해가는 김윤환 원내총무.
“총재 어른, 지가 전화를 올린 것은 그런 일 때문이 아닙니다. 또 지는 그런 일은 잘 모릅니다.”
“마, 좋습니다. 나도 김 총무가 그런 일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말해 보소. 무신 일이지요?”
“지가 전화를 올린 거는 시국 상황과 관련해서 총재 어른께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섭니다.”
여기서 김윤환 당시 원내총무의 진술이다.
6공 정권의 중간평가, 정계개편 나아가서는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먼저 기자의 질문.
“지금까지 알려지기는 89년의 중간평가 유보와 정계개편, 그리고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혁은 그 전해 88년 8월 윤길중 민정당 대표의 마닐라 발언이 신호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윤 대표는 야당과의 연정 가능성과 함께 내각제 개헌을 시사하는 정계개편론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러자 뒤이어 원내총무인 김 의원의 유사 발언이 나왔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이미 그때 여권 핵심부에서는 정계개편 즉 3당 합당의 시나리오가 논의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김윤환 총무의 답변이다.
“그때까지는 그런 시나리오는 없었다. 윤 대표의 마닐라 발언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하도 답답하니까 개인적인 소견을 말한 것뿐이고 나는 윤 대표의 발언을 보충설명하다 보니 마치 정계개편이라카는 정치 과제가 대 야당 접촉창구이자 원내 사령탑인 내한테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88년 연말쯤 이 문제를 가지고 노태우 대통령하고 상의를 했는데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각하.”
“말해 보소.”
“말씀 안드려도 알고 계시겠지만 이대로는 안되겠습니다. 무신 방법으로든지 정계개편의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이야? 그럴라카만 구체적으로 개편의 방법이 제시돼야 안되나.”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각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구체적으로 방법을 찾아볼 기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 무신 말을 하고 있어. 그라만 내가 무신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김 총무가 모르고 있다 그 말이야.”
“지가 언제 그렇다고 했십니까?”
“아니만 뭐야. 그걸 모르니까 결심을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니야.”
“죄송한 말씀이지만 각하. 사람들이 각하를 두고 뭐라 카는지 알고 계십니까?”
“뭐를 뭐라고 해. 내가 뭐가 어때서?”
“사람들은 각하를 보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태우가 아니라 ‘물태우’다….”
순간 노태우 대통령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면서 눈썹이 치켜 올랐다.
“뭐이, 노태우가 아니라 물태우?”
김윤환 총무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을 눈앞에 두고 물이라고 한 것은 지나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다.
“그만큼 우유부단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가 어떻게 각하의 결단 없이 일을 추진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히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윤환 총무는 웃을 심정이 아니었다.
“각하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정계개편이 아니고는 임기 내내 물태우라는 말을 벗어나지 몬할 낀데 어데서 웃음이 나옵니까!”
그러자 미소의 흔적이 채 가시기 전의 얼굴이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결연한 어조로 한마디 내뱉었다.
“봐라 김윤환이! 나는 물태우가 아니야! 정계개편의 구도를 책임지고 그려와, 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