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 합당을 권유하는 민정당 김윤환 총무에게 김영삼 총재는 “중간평가를 해야 전두환도 살리고 6공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 ||
우리는 중간평가 유보-3당합당으로 이어진 14년 전 6공 노태우 정권의 정계개편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에게 전두환 전 대통령 문제의 해법으로 중간평가 실행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 와중에 터진 채문식 민정당 고문의 백담사 방문은 노태우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89년 4월29일 채 고문의 백담사 방문엔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백담사 일지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89년 4월29일.
채문식 민정당 고문이 내방했다.
채 고문은 전임 민정당 대표이자 국회의장을 지낸 분이다. 여권 요직 인사로서는 최초의 백담사 방문이 되는 것이다.’
여권의 요직 인사로서는 최초의 백담사 방문.
이 말을 뒤집으면 여권에서 채문식 고문급의 인사로는 누구도 백담사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것은 곧 백담사의 출입자 통제가 그만큼 철저했다는 의미도 된다.
쉽게 말해서 6공 정권은 고위급 인사들의 백담사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으며 감시했다는 뜻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을 들어보자. S대령이다.
“89년 4월은 백담사 일지의 기록대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문제 또는 백담사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거처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던 그런 시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6공 정권으로서는 백담사에 대한 출입 통제 또는 감시망을 더욱 철저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채문식 고문이 백담사를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로한 바 있었다.”
이현우 경호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경호실장입니다.”
“나, 대통령이야.”
여느 때보다 낮게 깔리는 노태우 대통령의 음성에 직감적으로 긴장하는 이현우 경호실장이다.
“말씀하십시오. 각하. 무슨 일입니까?”
“무신 일이 아니야? 그만큼 얘기했는데 백담사 경비를 어떻게 하고 있나?”
“백담사 경비는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하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구멍이 뚫렸나?”
“구멍 안 뚫렸습니다.”
“안 뚫리긴 뭐가 안 뚫려. 경비를 철저히 했는데 채문식 고문이 어떻게 경비선을 통과했나 말이야?”
“아, 그 말씀입니까. 그 일은 보고를 받았는데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노 대통령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경비가 잘못된 거 아니야. 그런데 뭐 아니라카나.”
이현우 경호실장의 항변도 만만치 않다.
“경비가 잘못된 게 아니라 경비 초소에서 적극 만류했는데 채 의원이 말을 안 들었습니다.”
“뭐야, 채 의원이 말을 안 들었어?”
다시 S대령의 진술이다.
“채문식 고문은 용대리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다. 초소 경비를 맡고 있는 경찰이 ‘백담사하고 사전에 연락이 됐느냐’고 물어 ‘안 됐다’고 하니까 ‘그럼 전화를 빌려 줄 테니까 여기서 그냥 전화만 하고 돌아가라’, 이렇게 제지를 하니까 채 고문은 버럭 화를 냈다.”
“뭐가 어째? 여그서 그냥 전화만 하고 돌아가. 이런 문디 자슥들!
이놈들아 내가 이래 봬도 전직 국회의장이야. 여당 대표에다 국회의장을 지낸 사람인데 예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라는 기 대체 무신 수작이야!
너그들이 뭐라카든 나는 들어갈 테니까 어데 너그들 맘대로 해 봐라.”
채문식은 누구인가.
아니, 그보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노태우 정권의 철저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백담사를 방문했는가.
▲ 89년 4월29일 채문식 당시 민정당 고문(오른쪽)이 백담 사를 방문한다. 채 고문은 전두환씨를 찾아가 자신이 당내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며 한탄한다. 한편 노태우 대통령은 경비병의 저지에도 불구, 기어이 전씨를 찾은 그의 행동에 대로한다. | ||
“그것 참 재미있구만. 그랬더니 경비병들이 아무 소리 몬하고 통과시켰다, 그 말이지요?”
“아니만 지놈들이 우짤낍니까. 전직 국회의장을 죽일 낍니까, 살릴 낍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순자 여사도 거들었다.
“그건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의장님께서 잘못하신 것 같아요. 상대는 초소 경비병들이 아니라 대통령 아녜요? 대통령이 백담사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오셨으니 무사하겠어요.”
“그거는 영부인께서 저를 잘못 보셨습니다. 얘기를 하자면 길어지지만 지가 4·26총선 후에 와 당 대표에서 물러났는지 아십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신 대답했다.
“그거는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진 거 아닙니까?”
“그기 아니지요. 지가 무엇 때문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진다 말입니까?”
안현태 경호실장이 당연한 듯이 지적했다.
“당 대표 아니셨습니까? 당연히 책임을 지셔야지요.”
“참 모르시는구만. 그러만 운경은 그때 어째서 공천에서 탈락했어요?”
운경은 이제는 고인이 된 이재형 국회의장이다.
“참 그 말씀은 좀 해 보시지요. 그분은 무슨 이유로 공천조차 못 받았습니까?”
“얘길 다 하자면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나도 그렇고 운경도 그렇고 우리 각하께서 자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빌미가 돼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굵은 목소리가 짧은 정적을 깼다.
“그기 참말입니까? 운경이나 채 대표가 내가 임명한 사람이니까 푸대접을 받았다, 이 말이지요?”
그때 채문식 고문은 무슨 마음으로 감시의 눈길이 철저한 백담사를 찾아갔는가. 여기서 6공 청와대 L비서관의 진술이다.
“소급해 올라가보면 그 전해 88년 4·26총선 때 채 고문은 민정당 대표였다. 물론 노태우 대통령이 임명한 것은 아니고 전두환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었는데,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 공천 과정에서 당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소외당했다. 지역구 공천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전국구 공천에서 그랬는데 그 한 예가 이재형 국회의장의 공천 탈락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당시 민정당의 김윤환 원내총무의 정계개편 뒷얘기에 관한 기자와의 일문일답으로 돌아가자.
기자가 물었다.
“결국 김 의원께서는 그때 처음부터 민주당과의 통합에 뜻을 두고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때 어떤 방법으로 김 총재를 설득했으며 김 총재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전에도 상도동 김 총재 집은 자주 들르는 편이었는데 이 날은 정계개편 얘기를 하기 위해 차남 현철씨 집에서 김 총재를 만났다. 아마 보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 총재와 김윤환 원내총무 간의 대화.
“총재 어른,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총재께서는 이 나라 대통령이 되는 기 꿈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총재께서 대통령이 되실라카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평민당하고 통합해서 통합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정당하고 통합해서 여당 후보가 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더러 우짜라고?”
“제가 보기엔 평민당 김대중 총재하고 합친다는 거는 처녀가 얼라를 낳는 거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뭐 그래. 요새는 처녀도 얼라를 잘도 낳더구만.”
“그거는 변칙이지요. 그기 어데 정상적입니까? 그래서 말씀을 드리지마는 그렇다면 우리 민정당하고 통합해서 여당 후보가 되시는 기 훨씬 빠르다고 봅니다. 그라고….”
“그라고 또 있나?”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가 간곡히 당부했다.
“우리 민정당이 과거의 민정당 같으만 지가 통합하자는 얘기 꺼내지도 몬합니다. 그러나 6공은 국민이 직접 투표해서 출범시킨 정당성 있는 정붑니다. 6·29선언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고 민주화는 우리 민정당의 목푭니다. 총재께서 민정당의 리더가 돼서 민주화를 완성하는 기 어째서 변신이 되겠습니까. 그렇잖습니까 총재 어른?”
다시 기자의 질문.
“결국 김 의원의 설득은 주효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가 그 즉시 합당을 수락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 때 김 총재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도 참 어려운 말씀인데 그런 얘길 하셨어요.”
‘보소. 김 총무. 내가 무엇 때문에 자꾸만 중간평가를 하라카는지 모르지요?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씨를 살리기 위해 그런 겁니다. 중간평가를 해서 정면 돌파하면 6공도 살고 전두환이도 살리고 다 살아요. 그런데 와 그거를 안 할라고 해요?’
그렇게 해서 정계개편의 기초가 다져지고 궁극적으로 민정/민주/공화의 3당 합당이 성사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평민당이 이 거스를 수 없는 정계개편의 역사적 물결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시 80년 서울의 봄 때에 전두환과 김대중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이 부분, 먼저 동교동계 가신 중의 한 사람 김옥두 민주당 의원의 진술이다.
“80년 5월17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밤 10시쯤인가 40여 명의 잘 훈련된 군인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로 보이는 몇 사람이 동교동에 쳐들어 왔다. 군화발로 방에 들어와서는 총칼로 김대중 선생을 연행해 갔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고문실로 끌려가서 김대중 선생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면서 며칠 동안을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빨갱이다, 김대중의 지시로 이북에 몇 번 갔다 왔느냐, 이북 가서 김일성이를 몇 번 만났느냐, 군부 내 김대중 인맥은 누구냐, 경제인 중에서 김대중에게 돈 준 사람은 누구냐 등등.’
한결같이 터무니없고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나는 죽기를 각오해야만 했다. 그들의 요구를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들은 어서 시인하라고 또다시 몽둥이찜질을 가해 왔다.”
당시 고문 전담 수사관들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도 수사관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고문을 한다’라고.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상부란 어디인가. 아니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