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신군부는 김대중과 연루자 40여 명에게 내란음모 라는 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20여년의 세월 이 흐른 지금 ‘음모자’들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사진은 옥중의 DJ. | ||
북한에 햇볕을 쏟아 부은 대가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의혹을 뒤로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평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김대중 정권 5년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의 역대 정권의 그것처럼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IMF 경제 위기를 타개한 경제적 성공의 이면에 대북 송금 파문이라는 비난의 소지를 남긴 채 3김 시대를 마무리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까지 목숨을 걸고 희생한 많은 사람들의 투쟁을 잊어버린 듯하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최근의 북한에 대한 햇볕 정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난 80년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온 것에 대한 평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 암울하던 80년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수사국장 이학봉입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화다.
“나, 사령관이야.”
“말씀하십쇼. 무슨 일입니까?”
“무신 일이 아니라 김대중이 수사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인자 그만 매듭을 지을 때가 된 거 아니야.”
“안그래도 그럴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거를 만드는 일이 쉽질 않습니다.”
“근거를 만드는 일이 쉽질 않아?”
“김대중이는 물론이고 그 밖의 사건 관련자들이 결사적으로 입을 안 열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수사가 좀 지연되고 있는데.”
“이것 봐. 수사국장.”
“말씀하십쇼. 사령관님.”
“근거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카는 거는 내도 알아. 쉽지 않은 거를 쉽게 만드는 기 이학봉이가 할 일 아니야.”
“그거는 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놈아들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말을 잘 안듣습니다.”
“누가 말이야 김대중이가 말이야?”
“김대중이도 그렇고 동교동계 전체가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을 해봤는데.”
“봐라 봐라. 시방 무신 말을 하고 있나. 그기 설득을 해서 될 수 있는 일 이야? 그런 식으로 하니까 그쪽에서 말을 안들을 것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 의미의 설득이 아닙니다. 사령관님.”
“아니야?”
“처음에는 그런 의미의 설득으로 모두 사실을 시인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전혀 효과가 없어서 다음에는 물리력을 가미하는 방법으로 설득해 봤는데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런 일 없다. 강요하지 말라. 안한 것을 안했다카지 어떻게 했다고 할 수 있나.’ 심지어 문익환이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애국자다. 김대중이를 죽이면 당신들은 반드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몇 사람의 진술을 들어보자.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에 관련된 동교동계의 증언이다. 먼저 이해동 목사.
“7월12일 37명이 남산 지하실에서 육군본부 계엄보통 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되었다. 검찰의 임무는 남산 지하실에서 수사한 결과를 확인하는 일이었는데 강압과 고문 속에 진술한 내용을 부인하고 나서자 검찰관은 입회 헌병을 밖으로 내보낸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인이다. 따라서 상부의 명령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진술 내용을 부인한다 해도 우리는 어차피 시인한 것으로 꾸밀 수밖에 없다. 진술 내용은 법정에 가서 부인하고 여기서는 일단 시인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피차 이로울 뿐 아니라 어차피 검찰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 조서에 도장을 찍으라.’그것이 함정이었다. 검찰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다는 바람에 도장을 찍었는데 법정에 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검찰 진술 역시 충분한 증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남산 지하실에 끌려간 문익환 목사는 DJ의 구명을 호소 한다. (왼쪽), 최형우 의원은 남산 지하실 ‘붉은방’에서 극심한 고통을 맛본다. | ||
“처음부터 담당 검찰관은 애원했다. 남산 지하실에서 진술한 내용을 시인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이 달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검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 죽어도 죽어야 하니 나를 살려달라.’ 버텨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진술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제 고인이 된 문익환 목사. 그는 자신보다 오히려 김대중의 구명을 간청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애국자다.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76년 3월1일 구국선언사건으로 구속되었을 적에 면회 온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미국 대사관에 가서 내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고 이렇게 전하라. 김대중이는 미군 철수를 반대한다.’
그 사람은 구국선언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국가 안보에 관한 한 오히려 정적인 박정희를 도와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나. 나는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다 써 주었다. 대신 당신들은 김대중씨를 죽이지 말고 살리라. 그렇지 않고 당신들이 만일 그 사람을 죽인다면 역사의 심판이 내릴 때 반드시 준엄한 판정을 받게 될 것이다.”
색다른 진술이 있다.
7월12일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연루자 37명을 육군본부 계엄보통 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한 합동수사본부는 일주일 만인 7월18일 여야 정치인 17명을 불법 강제 연행, 보안사 서빙고 분실과 태평로 소재 국회 별관에 감금했다.
김현옥, 고재일, 구태희, 길전식, 김용태, 신형식, 장영순, 현오봉, 구자춘, 정해영, 고흥문, 송원영, 김수한, 박영록, 박해충, 김동영 및 최형우 등이다.
이중에서 최형우 전 의원의 진술이다.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서 발췌한다.
‘이번에 내가 끌려간 곳은 그 유명한 서빙고 보안사였다. 김재규가 사령관이었을 때 완공한, 그리고 취조를 받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건물이다. 끌려가자 곧바로 어딘가에 처넣어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서빙고 담벼락을 빨갛게 칠한 조그만 방이었다. 그래도 내가 3선 의원이므로 대우를 하느라고 제법 화려한 방에 모시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듯 순진한 생각은 하룻밤을 자고 나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밤이 돼 잠을 청할라카자 사방 담벼락의 빨간 빛깔이 전깃불에 반사되어 마치 화살처럼 내 눈을, 전신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감아봐도 소용이 없다. 와이셔츠를 벗어 두 눈을 동여매도 빨간 화살은 영사기의 빗살처럼 눈동자를 마구 찔러댄다. 환각과 환청이 일어나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마침내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세월 속에 세상은 바뀌었다. 누가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89년 4월13일 백담사 일지를 보자.
‘오전 11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 정원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다리 가설 공사도 병행했다. 백담사엔 대문 앞 개울에 걸쳐져 있는 통나무 다리와 위쪽으로 화장실 옆에 있는 징검다리 등 두 개의 다리가 있으나 둘 다 제대로 다리 구실을 못했다. 개울 상류에 있는 징검다리를 고치기로 하고 인근 군 부대에서 드럼통을 얻어 오게 하여 엮어 놓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씌워 임시 교량을 가설토록 했는데 이 공사를 직접 구상하고 지휘한 것이다.’
다시 S대령의 진술이다.
“백담사 일지에 따르면 해가 바뀌어 1989년 백담사엔 거의 방문객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4월이라지만 백담사는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다시 또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전두환 전임 대통령 부부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가. 1월18일. 이날은 전 전 대통령의 59회 생일날이었는데 찾아온 사람은 가족들과 측근들뿐. 외부 손님으로는 유일하게 법정 스님이 방문하고 있다. 그런 것이 서러웠던지 전 전 대통령은 한잔 술에 취해서 18번인 ‘방랑시인 김 삿갓’을 ‘방랑시인 전 삿갓’으로 고쳐 부르며 대성통곡하고 있다.
1월20일. 원주에서 지학순 주교가 방문하고 LA 교포 민아무개씨가 돈 1천달러를 보내온다. 2월6일. K산업 P전무가 찾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날부터 전 전 대통령 부부는 1백일 기도에 들어간다. 2월22일, 부산에서 불교 여신도 30여 명이 관광을 겸해서 찾아왔는데 이렇게 기록돼 있다.”
당시 부산에서 올라온 여신도 30여 명은 용대리 입구에서 초소 경비병들이 가로막자 거세게 항의를 했다. 불교 신자가 절에 가는 것을 막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니 옳은 말이어서 도후 스님이 입구까지 나가 이들을 인도해 들어왔다. 신도들 중 할머니 한 분이 항의하듯 묻는다.
“여게 대통령께서 사시지예, 그렇지예?”
안현태 경호실장이 맞이했다.
“그렇습니다. 할머니.”
“찾아오기는 바로 찾아왔네. 대통령께서 어데 계시능교?”
“저어기 보이는 법화실에서 사십니다.”
“그러만 좀 나오시라카소. 우리는 대통령 만나볼라고 부산에서 여까지 먼 길을 안올라왔능교.”
“죄송합니다. 할머니. 어르신께서는 마침 서울에서 손님이 내려오셔서 나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라지 말고 좀 나오시라 카소. 대통령 만나볼끼라고 여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 있십니꺼? 아니만 쳐들어 간다카고 나오시라 하소.”
계속되는 S대령의 진술.
“2월26일, 부산에서 올라온 불교연합회 회장단 일행이 백담사를 방문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봉암사 조실 송서암 스님을 비롯해서 서의현 총무원장, 세민 스님, 홍천 스님, 상진 스님, 효성 스님, 지원 스님, 혜법 스님, 그리고 월정사 주지승 도명 스님 등이 찾아와 환담을 나눈 바 있다. 그러나 이 기간 서울에서는 아무도 찾아 온 사람이 없다. 최소한 4월29일까지는.
4월29일, 서울에서 누가 찾아왔느냐? 전 전 대통령에 의해 국회의장, 민정당 대표 등을 지낸 채문식 의원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간 서울에서는 왜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없었을까. 꼭 들어맞는 이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사유가 2월9일자 백담사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이다.
‘89년 2월9일. 지난 연말 대통령께 세배를 드리러 왔던 관할 지역 군단장과 사단장이 오늘 기어이 문책 인사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