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 5월30일 김윤환 민정당 총무는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을 찾아가 5공 청문회의 증인으로 나와줄 것을 요구하지만 “정호용부터 세우라”는 말로 거절당한다. | ||
그간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 검사들의 주장이고, 그랬기 때문에 이미 권력의 시녀 노릇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걷어내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입장이다.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공개토론을 고비로 큰 산 하나를 넘은 셈이 됐지만 아직도 파격 인사를 둘러싼 물밑 파문은 계속되고 있다.
권력과 검찰. 우리 검찰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대표적인 사례는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다. 당시는 검찰뿐 아니라 변호사들조차도 함부로 변론에 나설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 월간지와의 옥중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먼저 기자의 질문.
“81년 초 김대중씨를 사면한 것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답변.
“당시 주미 공사 손장래씨가 그런 주장을 했는데 전혀 다르다. 그 사람이 한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신 역할을 했는지는 내가 잘 모르지만 미국과의 정상회담은 그 사람이 주도한 게 아니다. 내가 아는 한 당시의 주역은 유병현 합참의장, 김용식 주미 대사였다. 이분들이 이미 큰 틀을 마련해 놓은 상태에서 손장래씨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손장래씨는 유병현 의장이 맡아 하다가 일이 잘 안돼 자기가 나섰다카지만 그런 기 아니다. 어찌 됐든 분명히 말하지만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김대중씨의 사면을 전제 조건으로 논의했다카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다시 기자의 질문.
“당시 미국과 일본은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와 관련해서 한국 정부에 대해 강력한 압력을 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외신 보도에 따르면 심지어 일본에서는 부두 노조원들이 한국 상품의 하역을 보이코트했습니다. 결국 김대중씨의 사면은 한미 또는 한일 관계의 개선을 위해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게 정설인데….”
전 전 대통령의 답변이다.
“만일 미국측이 그런 식이었다면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나한테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주변에서는 자꾸만 ‘김대중씨 사면에는 정치적인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고 하지만 참말로 그런 일은 없었다.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김대중 사면과 연계시킨 일도 없었다. 김대중 사면의 효과가 한미정상회담 성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모르지만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대중씨를 사면한 건 아니다.
나가 그때 그런 식의 정치적 술수를 쓰는 사람이었다카만 좀 더 그럴듯하게 사면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은 나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던 사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했다면 나가 그때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었던 바로 그날 김대중씨를 사면했겠나? 나는 재판을 지켜보는 과정에서부터 사형은 안 된다카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째서 그 사람을 구속해서 재판에 넘겼느냐. 그때는 상황이 불가피했다. 그랬기 때문에 마지막 법원의 판결을 기다렸다가 사면을 단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김대중씨는 결과적으로 나가 살린 것이다.”
과연 그랬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부터 현장 검증을 통해 진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전두환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와의 만남. 82년 2월 초, 장소는 이 여사의 표현을 빌린다면 청와대 내 조그만 다리를 건넌 곳에 있는 조그만 통나무 집.
이희호 여사의 진술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내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것은 청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남편을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는데 그 사람은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내내 자기 얘기만 했다. 그때 참다 못해 내가 그랬다. ‘대통령 각하. 저희 남편을 속히 좀 석방시켜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전두환 대통령) 단호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로부터 불과 7년 후.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가 백담사를 방문한 것은 백담사의 전두환 이순자 부부가 백일기도를 끝낸 지 약 15일 뒤인 89년 5월30이었다. 그런 기록이 백담사 일지에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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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문회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호용’ 답변은 결국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사진은 5공 관련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는 정호용. | ||
이날 서울에서 김윤환 총무가 내려왔다. 임무는 국회 증언과 관련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윤환 원내총무는 야당측이 요구하고 있는 5공 청산의 핵심 즉, 정호용, 이희성, 이원조, 장세동, 안무혁 및 허문도 이 여섯 명에 대한 처리와 관련한 전 전 대통령의 결단을 요청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답변.
“내가 광주 청문회, 5공 청문회에 나가는 거는 문제가 아니야. 공개든 비공개든 그런 거 상관없어. 문제는 그기 아니라 내가 청문회에 나가 증언을 했다고 해서 과연 5공 청산이 끝나겠느냐, 이 말이야.”
김윤환 총무의 질문.
“그것만 가지고는 야당쪽에서 5공 청산은 끝난 것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다시 전두환 전 대통령.
“먼저 5공 핵심 6인방을 처리하고 그라고 나서 최종적으로 나를 국회로 끌어내서 증언을 시키는 것으로 5공 청산을 마무리하자는 게 야 3당의 계산인데 정호용이를 처리하지 않고 나를 증언대에 세워서는 5공 청산은 끝나는 기 아닌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내한테만 청문회에 나오라카고 정호용이는 처리 안하나. 순서로 봐서 정호용이부터 처리가 돼야 내가 청문회에 나가 5공 청산을 매듭지을 거 아니야.”
여기서 진술이다.
전 전 대통령은 이때 무슨 속셈으로 정호용 등 여섯 명, 특히 정호용 의원은 먼저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S대령이다.
“진술에 앞서 먼저 상황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당시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가 백담사를 방문한 것은 5월30일, 그러니까 그보다 11일 전인 5월19일에 있었던 여야 중진회의에서 나온 합의 사항, 즉 전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백담사측은 여야 중진회의 결정을 보고 격분했는데 특히 심한 쪽이 안현태 이양우 등 측근들이었다. 안현태 경호실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내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짓들이야! 야당은 그렇다 치고 민정당이 이런 짓을 하면서 우리쪽에 한마디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노태우, 우리 어르신의 의사를 이렇게 깡그리 무시해도 되느냐 이 말이야’.”
다시 S대령의 진술.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 백담사측을 격분케 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전 전 대통령에 의해 합참의장에 임명됐다가 임기도 못 채우고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옷이 벗겨진 최세창 예비역 대장의 백담사 방문이었다.
결국 최 장군은 경비차 나와 있던 보안사 요원들의 제지로 백담사 방문을 포기했는데 이때 백담사측이 분노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현역 군 장성들의 백담사 방문이 금지되고 있는 상태에서 심지어는 예편한 옛 부하, 더구나 함참의장까지 지낸 옛 후배의 방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둘째는 보안사의 전화 도청이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안현태 경호실장 사이에 오간 대화내용이다.
“전화 도청이라니 그기 무신 말이야?”
“각하, 지금까지는 용대리 검문소에 보안사 아이들은 나와 있질 않았습니다.”
“그랬나?”
“예,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쪽 아이들이 나와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최 장군 때문이었습니다.”
“최세창이를 못 들어오게 할려고?”
“그렇습니다. 아니면 보안사에서 최 장군의 백담사 방문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전화 도청을 했으니까 알게 된 것 아닙니까….”
“아, 인자 무신 말인지 알겠구만. 그러니까 어제 아침인가….”
“그렇습니다. 최 장군이 백담사를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화로 알려 왔을 적에 이 전화를 도청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 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카더니만 참말로 그러네. 백담사 호랑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카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6공 청와대 L비서관의 진술이다.
“백담사측이 행동으로 나선 것은 바로 이 사건 직후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백담사의 분위기가 험악했다는 사실은 노태우 대통령도 알고 있었다. 이유는 노 대통령이 그동안 안부전화나 인편을 통한 편지 한 통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노태우 대통령이 알게 된 것은 전 전 대통령과 가까운 서울의 김아무개 목사가 백담사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달해서였는데 비로소 백담사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알아차린 노태우 대통령이 조치를 취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이현우 경호실장이 나눈 대화는 이렇다.
“경호실장, 다른 기 아니고 내가 시방 김 목사를 통해 백담사 분위기를 전해들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심상치가 않다면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경호실장이 그런 것도 파악 못하고 있었나. 저쪽에서 또 폭탄 선언을 할라고 준비중이라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나 말이야. … 여러 소리하지 말고 빨리 성환옥 경호실 차장을 백담사로 출발시켜. 빈손으로 가서는 안되니까 백담사에 필요한 기 뭔가 알아보고 준비해 가지고 가서 정중하게 안부를 전하라고 해. 나를 대신해서 말이야.”
폭탄 선언의 내용이 뭐길래 노태우 대통령이 이토록 다급해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