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정부’의 기치를 내건 노무현 정부는 늘어진 개혁의 고삐를 조이면서 동시에 화합을 이뤄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사진은 취임사를 하고 있 는 노무현 대통령. | ||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은 우리나라가 파란과 격동 속에서 현대 민주사회로의 기틀을 하나씩 다져온 시기라 하겠다. 그리고 이제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한 달째를 맞아 새로운 역사가 씌어지고 있다.
우리 국민의 반은 기대 속에, 또 절반 가까이는 비판적인 눈으로 현 정부를 바라보고 있다. 검찰 개혁은 일단 노무현 대통령의 승리로 판정된다. 앞으로 노사 문제, 교육 및 복지 정책, 외교 문제 등 산적한 현안들을 ‘개혁’이라는 잣대로 접근해 처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커다란 실험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층과 신진 세력 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한판승부다. 당분간은 개혁에 저항하는 부류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정도로 강력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체감을 가진 파워의 핵이 있어야 한다. 힘을 동반하지 못한 개혁이란 기존의 체제를 흔드는 한낱 소동에 불과한 것이다.
더 강력한 수권 정당을 만들기 위해 민주당이 분당을 할 것으로 관측된다. 특검법 제정을 두고 일어난 내분도 심상찮다.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구주류와 정대철 정동영 등 신주류 사이에 넘기 힘든 벽과 골이 있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는 상황이다. 당내 신진 세력들은 ‘일일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면 어차피 갈라설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구파들은 ‘대통령에 당선된 게 누구 덕분이냐’고 격앙하고 있다.
한나라당 일부에서도 민주당의 분당 움직임을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물론 한나라당 내 소장파 의원들의 동요도 예상되지만 민주당 내 구주류 중에는 한나라당 내각제 옹호론자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의원들도 있다. 이럴 경우 보수와 진보(개혁) 세력 간의 ‘정계 개편’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 땅에 보수와 진보는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나이가 많으면 보수고, 그렇지 않다 해서 개혁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 설정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이 전임 김대중 대통령에게 기대를 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이념이나 정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대 간의 격차가 더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의 ‘노인 정치’는 힘있는 정권에 대한 갈증을 더욱 심화시켜 마침내 386세대가 일어나 젊고 힘있는 대통령을 뽑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볼 때 과연 현 정권이 힘이 있는지, 그 힘이라는 것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힘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새로 구성된 청와대 구성원의 자질이나 능력에 대해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대변인이 어떻고 인사보좌관이 어떻고 하는 말들이 나온다. 언론을 통제한다느니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다느니 말들도 많다. 하지만 지금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에 한 일을 생각할 때 그렇게 떠들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개혁의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 그보다 개혁에 저항하는 힘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조직적인지는 잘 알려져 있다.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성실한 교수들이 대학에서 실제로 존경을 받으면서 우리의 지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는가. 유능하고 부지런한 노동자들이 잘 살아가고 있는가. 청렴하고 투명한 경영을 실천하고 있는 기업인이 성공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민중의 힘이 되고자 하는 공직자들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는가.
문제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이다. 성실하게 원리 원칙을 준수하는 이들보다 약삭빠르고 편법에 능통하고 이른바 ‘잔머리’를 잘 굴리는 자들이 더 잘되는 게 현실이다. 지난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어느 사이에 결과만을 놓고 어쨌든 수단 방법을 떠나서 이기고 보자는 식의 논리가 퍼져 있는 것이다.
경기도 일산 인근의 어느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나 어려운 공부 대신에 풀 내음을 맡게 하고 꽃향기를 체험하게 한단다. 이 얘기를 들은 엄마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할까. 겉으로는 지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놓고 뒤에 가서는 ‘그래 쟤네들 놀 때 우리 애들은 열심히 공부시키자’ 이렇게 생각할 엄마들이 더 많을 것이다.
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무리를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주식 투자해서 깨지고 있는가. 그도 부족해서 가족들을 미국이나 뉴질랜드로 떠나보내고 가장은 기러기 아빠가 되고 엄마는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누나는 룸살롱에 나가고 심지어 애들까지 학원비 마련 원조교제에 나서는 실정이다.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며, 그렇게 해서 얻어낸 학교 석차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애들에게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가르치지 못하며 유치원 시절부터 몇 십 년 앞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비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사교육을 전면 금지시키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나. 수십조원 규모의 경제 주체가 흔들리게 되며, 다수의 유권자를 잃는 것이며 막대한 정치자금 공급원을 상실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인가.
▲ 위 사진은 10년여 전 보수 대 개혁의 정계개편을 이뤘던 당시의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총재. 최근 민주당 내의 동교동계와 신주류의 갈등은 또다시 보혁 구도의 정계 개편을 예고하고 있다. | ||
단기적 처방은 정치가 바로 서고 그에 따른 법과 제도의 완비가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의식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로 부르고 있다.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국정에 많이 반영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때문에 인터넷과 시민단체를 활용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성격이 강하다. 이를 주도하고 뒷받침하는 세력들은 물론 20∼30대의 젊은층 특히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 중에서 안희정씨와 이광재씨는 39세의 83학번들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정신적 83학번’이라며 동지애를 과시한 바 있다. 우리 나이로 40줄에 막 오르는 이들을 마치 철없는 젊은이로 몰고 있는 노회한 기성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젊은 측근들에게 흠집을 내서 대통령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간 정치 현장에서 터득한 경험과 유권자의 진심을 사로잡는 노하우를 전수해줄 만한 훌륭한 선배들도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다. 후배 입장에서도 ‘그간 우리 정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략과 술수와 흑색 선전 말고는 뭐가 있느냐’는 냉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세대간 계층간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돌던 유머가 생각이 난다. ‘부산 앞바다에 엄지손가락이 떠오르고 있다. 믿고 찍어 줬는데 부산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는 게 없다. 속았다 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찍은 손가락을 잘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목포 앞바다에도 역시 ‘손가락’ 얘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최근 호남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시큰둥하다는 말들이 있다. 조만간 어느 앞바다에 손가락이 떠올랐다는 말이 안 나올 거란 보장도 없다.
경상도 출신 대통령을 호남 사람들이 밀어서 당선시켰다는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참여정부 출범 한 달을 맞아 그간의 인사를 보니 호남을 배제시키고 타 지역 출신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탓이다. 그만큼 우리네 민심은 성질도 급하고 불신의 골이 깊은 셈이다. 이 상태로는 정권 차원에서 개혁을 밀고 갈 힘도 없고, 설사 모양을 갖춘다 해도 그 개혁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내 상당수 구주류들은 언제 자신들을 쫓아낼까 하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신주류들은 구파들이 밀려나지 않으려고 벌써부터 불필요한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최근 이강철씨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무특보 자리에 앉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의 박철언 정책보좌관에 비견되는 자리이다. 이강철 특보의 최근 언행은 정계개편의 회오리가 임박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그가 최근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동교동계는 신주류가 자신들을 따돌리려 한다는 등 쓸데없는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동교동계가 빨리 좀 나가줬으면 좋겠다. 호남 사람들도 노무현 대통령이 일부러 호남을 무시하면 마음이 달라지겠지만 현재는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다. 동교동계가 없다고 해서 내년 총선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한광옥 김옥두 박상천 등 동교동측의 반발이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는지 면밀히 분석중이다. 서로를 보완해야 할 입장에서 특정 계파를 매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동교동계는 노무현 대통령이 잘 되기를 기원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있다. 때가 되면 우리도 입을 열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몇몇 측근들과 민주당 신주류에서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심지어 5월 신당 창당설도 함께 나오고 있다. 이미 물밑에서 상당한 구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10여 년 전 3당 합당이 논의될 당시 제기되던 정계개편의 논리가 어쩌면 다시 테이블에 오르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개념상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수’ 대 ‘개혁’의 대 정계개편이 그것이다.
지난 3년간 이 ‘폭풍전야’ 시리즈를 연재해 오면서 화두는 다름아닌 정계개편이었다. 어떻게 하면 한 차례의 큰 폭풍을 헤쳐나감으로써 우리 정치가 차원 높은 발전을 이루고 민초들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폭풍이 몰아칠 역사적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고 있다. 정계개편보다 훨씬 강력한 폭풍은 한반도 통일이다. 하지만 통일을 감격스럽게 맞이할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새로운 세대는 통일의 의미를 얼마나 새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폭풍은 언제나 몰아칠 것이다. 다만 그 폭풍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크기에 따라 바람의 세기를 느끼고 못 느끼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