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는 컴퓨터에 열중하고 있는 이재용씨. | ||
나중에 이 회장의 출국 사실이 확인되자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12월12일 미국으로 출국,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고 첨단산업 육성책 등을 협의한 뒤 연말쯤 귀국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이같은 설명은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결국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삼성그룹의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연말에 귀국한다던 이 회장은 삼성그룹이 밝힌 귀국 시기보다 한 달이 더 지난 뒤인 2000년 1월26일 저녁이었다.
당시 언론사 기자들이 이 회장의 출국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회장은 출국하기 열흘 전인 12월3일 오가 노리오 소니그룹 회장을 한남동 승지원에서 접견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이 회장의 출국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가 IMF사태가 터진 1997년 말부터 2년 가까이 해외 출장을 가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삼성그룹 안팎에서 전개된 복잡한 사정에 비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이 회장은 1999년 초부터 시작된 언론사 세무조사로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구속되는 슬픔을 겪었고, 아들(이재용 상무보)의 증여문제로 정기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집중 공격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삼성자동차 법정관리에 대한 책임론마저 불거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 때문에 이 회장이 20세기가 저무는 시점에 해외 출장길에 오른 점은 별다른 의심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 지난해 3월 신임 임원 승진 축하연에 부인 임세령씨와 함께 참석한 이재용 상무보. | ||
“이 회장은 1999년 9월 삼성의료원에서 정기 신체검사를 받던 도중 오른쪽 폐 부근의 임파선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 종양으로 알았으나, 정밀 조직검사 결과 좌우폐 사이 림프절에 초기 암세포가 자라고 있음이 확인돼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진단을 받게 됐다”이 회장의 건강이상 사실이 알려지자 삼성그룹 임직원뿐 아니라, 재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재계 관계자들은 “선친도 암으로 고생하셨는데, 이건희 회장마저…”라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상이 확인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재용씨에게 집중됐다. 삼성그룹은 불의의 상황을 예견이나 한 듯 수년전부터 재용씨에 대한 승계작업에 착수한 상황이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갑작스런 건강이상이 삼성그룹 전체에 패닉현상을 불러오지 않을까 우려했다. 바로 직전, 4대 재벌의 하나였던 대우그룹이 김우중 회장의 경영공백으로 급속히 침몰했던 악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삼성그룹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기업답게 표면상 흔들리지는 않았다.
더욱이 삼성가와 삼성그룹 전체에 다행스러운 것은 이 회장의 암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2000년 1월27일 모친의 묘소 참배를 위해 일시 귀국했던 이 회장은 나흘 후인 1월31일 미국 휴스턴으로 다시 출국했다. 이 회장은 그 해 4월6일 귀국할 때까지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부인 홍라희 여사의 손을 꼭 잡고 공항에 모습을 나타낸 이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더이상 치료를 받을 게 없다는 병원의 통보를 받고 귀국했다”며 “그동안 걱정을 끼쳐 미안하며, 염려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는 소감을 덧붙였다.
이 회장이 병마를 이겨내고 있을 즈음, 삼성그룹에서는 경영 승계를 위한 작업이 더욱 발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삼성그룹은 더이상 경영 승계작업을 미룰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삼성그룹은 먼저 재용씨에 대한 여론 환기작업에 착수했다. 이 상무보에 대한 언론 보도에 알레르기 반응으로 일관하던 삼성 홍보관계자들은 “여론이 어떠냐” “경영참여 시기가 언제면 좋을 것 같으냐”고 진지하게 묻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2000년은 그렇게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는 숨막히는 한 해였다. 최대 현안이었던 이 회장의 건강에 대한 우려는 그가 활짝 웃는 모습으로 귀국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여기에 삼성구조조정본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재용씨의 경영참여작업도 가닥을 완전히 잡아가고 있었다.
이 회장도 치료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부터 달라진 행보를 보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사장단회의를 주재하고, 삼성자동차 부채처리 차원에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채권은행단에 내놓는 결단을 내렸다. 이같은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의 움직임과 함께 재계의 관심을 끈 것은 재용씨가 보여준 뜻밖의 행보였다. 아직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재용씨가 국내에서 인터넷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음이 감지된 것이었다.
삼성그룹 출신 인사들에 의하면 재용씨의 인터넷사업은 닷컴열풍이 몰아치던 1999년 말부터 착수됐다. 재용씨의 사업에는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의 직·간접적인 조언과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재용씨의 인터넷사업은 2000년 5월 자본금 1백억원으로 e삼성이 설립되면서 얼굴을 드러냈다. 2000년 말 재용씨의 인터넷사업은 e삼성을 중심으로 16개사(개인적인 투자회사 포함)에 달했다. e삼성인터내셔널, 오픈타이드(웹에이전시), 가치네트(금융), FN가이드(증권), 웰시아닷컴(금융), 뱅크폴(인터넷대출), 이니즈(자동차 매매), 인스밸리(생보), 크레듀(교육), 엔포에버(게임), 트랜스메타(CPU제조), 배틀탑(게임), 시큐아이닷컴(보안), 올앳(인터넷 카드) 등이었다.
재용씨가 인터넷사업에 나선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었다. 재용씨가 닷컴사업에 나선 것은 개인적인 관심분야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에서 컴퓨터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 때문에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뜨겁게 불던 닷컴열풍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또다른 배경은 경영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시 증여의혹 등으로 재용씨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빴다.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재용씨의 경영능력에 대한 객관적 입증이 필요했다. 인터넷사업이 성공한다면 재용씨의 경영승계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잠재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은 “재용씨의 인터넷사업 투자는 닷컴 열풍을 타고 삼성에서 고급 인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e비즈니스의 경험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그러나 인터넷사업은 결과적으로 그룹 계열사나 본인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재용씨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e삼성의 지분 75%를 제일기획에 넘겼고, 삼성인터내셔널 지분 60%를 삼성SDS와 삼성SDI에 팔았다. 가치네트, 시큐아이닷컴 등 나머지 인터넷기업들의 지분도 삼성그룹 계열사로 모두 넘겼다.
재용씨가 계획했던 인터넷사업의 성과를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재용씨는 사실상 인터넷사업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어쨌든 재용씨의 경영참여에 대한 시그널은 2000년 12월 무렵 외부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삼성증권 입사설, 삼성전자 입사설 등이 삼성그룹 외부에서 유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재용씨의 경영참여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2001년 초반부터였다. 그 해 1월9일 호텔신라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 59회 생일잔치에서 재용씨는 계열사 사장단과 첫 공식 상견례를 나눴다. 이어 1월10일에는 이건희 회장이 1년2개월 만에 전경련 회장단회의에 참석했고, 삼성그룹의 2001년도 정기 임원인사도 삼성전자의 정기주총이 열리는 2001년 3월9일 이후로 미뤄졌다.
마침내 이건희 회장은 2001년 2월28일 저녁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김각중 전경련 회장의 희수연에 참석해 “재용이가 올해부터 (회사에)나올 겁니다”며 아들의 거취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 회장의 이 말은 1995년부터 시작된 삼성그룹의 경영 승계작업이 사실상 마무리됐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선언인 셈이었다. <계속>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