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전경련 정기총회 직후 자리를 함께 한 정주영(맨오른 쪽) 등 전경련 임원들 | ||
이해상충와 갈등은 첨예할 수밖에 없었다. 신권력이 쥔, 이른바 ‘국책(國策) 사업권’ 조정을 둘러싸고 누가 더 이익, 더 피해를 보느냐는 것이 당시 재계에 불어닥친 핵심 현안. 정주영은 이때 일을, 두고 두고 억울해 했으며, ‘시장’을 무시한 권력의 무모한 개입선례가 한국경제 구조 전체의 앞날에 오래토록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대표 사례라고 주장한다.
한국산업 변천사에서 특별한 반성과 교훈을 함축한 이 사건, 그 실제는 어떠했을까. 당시 정주영에게 해당된 구조 조정은 승용차와 발전 설비 분야의 일원화문제. 국보위는 둘 중에 최소한 하나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이 사업을 ‘현대’의 양대 주력 사업으로 키워가던 정주영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던 것.
국보위는 마침내 총수들을 직접 불러들여서 막후 종용 혹은 강압하기에 이른다. 다음은 정통한 소식통이 전하는 그때의 강압 증언. “정주영이 측근인 정세영 이명박 이현태를 대동하고 국보위에 불려들어갔다. 통폐합 대상 이해 당사자인 대우의 김우중과 대우측 주요인사들이 먼저 와 있었는데, 경제 산업 구조 개편을 위해서 자동차 산업과 발전 사업을 통폐합하겠다는 설명 끝에 국보위 사람이 먼저 김우중에게 찬성 여부를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예, 저희는 찬성합니다’ 했다. 그 다음은 정주영이었다. ‘정주영 회장도 찬성하시죠?’ 정주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단호한 톤으로 잘라 말했다. ‘나는 찬성 안합니다.’ 그러자, 국보위 사람이 안색을 바꿔서 정주영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나라가 비상에 걸려 개혁을 하려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어째서 순응하지 않고 국책(國策)에 대항하느냐’는 질책이었다.
그리고는 국책에 협조적인 김 회장을 보라는 투였다. 그 말에 정주영은 다시 이렇게 항변했다. ‘나는 내가 만든 사업체를 어렵다거나 이득이 많이 난다고 해서 누구한테 넘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누구처럼 수단을 부려 경쟁 입찰 아닌 수의 계약으로 남의 기업을 차지한 적도 없다. 그런 식의 기업 경영을 나는 증오한다.’
▲ 지난 80년에 추진된 산업 구조조정과 관 련, 전두환 국보위원장은 정주영을 직접 만나 ‘자동차 부문은 현대로 일원화하겠 다’는 다짐을 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 ||
자동차와 발전 공장 둘 중에 하나를 김우중 보다 먼저 정 회장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만도 대단한 특별 대우인데 불복이 말이 되느냐는 으름장이었다. 그래도 계속 버티자 국보위 관계자들은 수행했던 정세영, 이명박, 이현태를 다른 방으로 각각 떼어놓고 협박하면서 회유하고, 회유하면서 협박을 계속했다.” 그 협박의 요지는 한마디로 ‘말을 듣지 않으면 현대 전체의 문을 통째로 닫게 할 수밖에 없다’ 는 것.
결국 정주영이 무릎을 꿇었다. 발전설비를 포기하고, 자동차를 선택키로 한다. 정주영 본인의 회고담. “끝까지 저항하다가 ‘현대’의 문을 닫을 수는 없는 일이고, 부득이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면 나의 내심은 자동차 쪽이었다. 그러나 당시 통합 대상인 새한자동차는 미국의 GM과 대우의 50:50 합작 회사였기 때문에 통합에는 GM의 지분 포기가 선결돼야 했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중공업은 모르겠으나 자동차 통합은 절대로 국보위 뜻대로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아현동 모처에서 이 문제로 전두환 국보위원장을 직접 만났다. 나는 GM이 50%의 합작 지분 포기를 절대 안할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 통폐합은 안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두환씨는 상공장관이 이미 GM의 양해를 얻어 결재까지 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 틀림없이 GM이 내놓도록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는 자동차를 선택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 후 진행된 ‘반(反) 시장원리적’ 통폐합 후유증도 점점 심각해진다. 새한자동차의 지분을 포기하기로 양해가 되었다던 미국 GM이 80년 9월부터 시작된 협상에서 왜 우리가 손해를 보느냐며 다시 반발하고 나왔던 것. 만일 GM의 요구에 응한다면 자동차 독자 개발은 수포로 돌아가고 까딱하다가는 GM의 조립 하청업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는 것이 현대측 입장.
전두환 정부는 그러자, 정주영측에 기아와의 합작을 종용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실패하자 마침내 승용차 일원화 조치를 완전 백지화하고 만다. 즉 새한(대우)과 GM의 합작은 존속시키면서 새한에도 승용차 생산을 풀어버리고 만 것. 현대가 대우에 넘기기로 한 ‘창원중공업’의 경우도 뒤틀리긴 마찬가지. 당시 부분적으로만 가동이 되고 있었고, 집중적 추가투자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정부는 무조건 신속한 인수인계만을 요구했다.
가격 정산이 문제였지만, 그것도 자산 평가에 필요한 제반 서류를 한국감정원에 평가를 의뢰해서 나중에 하면 되니, 일단 국보위안대로 대우에 넘기고 보라는 것이 정부의 거듭된 통지. 결과적으로 정주영 입장에선 신군부 권력의 강압에 못이겨 ‘자동차’는 인수에 실패한 채 그대로 김우중의 대우에 남겨 두면서, 발전 설비 부문은 대우로 넘겨줘야 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대측 관계자의 회고담은 이런 불균형 조정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신권력의 당시 압박이 얼마나 드셌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는 대우의 자동차도 못 받는 판에 투자한 돈도 못 받는, 발전 설비 부문의 인계는 못하겠다고 버텼지만, 당장 시행하라는 신군부의 엄포는 계속 날아들었다. 대우가 본사 빌딩을 팔아서 청산해준다니까, 선(先)인수 후(後)청산으로 하자면서 공인 회계사를 내보내 자산 평가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더니 최후에 돌아온 무지막지한 협박은 ‘공수부대 보내서 내치겠다’였다. 별 수 없이 그럼 문서나 한 장 써달래서 받아 들고 ‘창원중공업’을 내주고 말았다. 1원 한 장 안 내고 ‘선인수 후청산’이라는 유례가 없는 특혜로 나로부터 ‘창원중공업’을 가져간 대우는 그러나 결국 힘에 부쳐 이 기업을 다시 정부에 내놓게 되고, 정부는 허둥지둥 한전과 산업은행, 외환은행을 주주로 한국중공업으로 상호를 바꿔 공사화했다.” 결국엔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공정 자유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틀을 무시한 신군부의 무모한 투자 조정은 불과 몇 해 후의 환경 변화도 적응하지 못하고 완전한 실패로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이 결과와 관련, 타계 얼마전 산업사적 측면에서 이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5공 초기, 산업구조조정은 해당 기업의 기술력과 기업 구조, 경영 능력 등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한 바보 같은 조정안이었다. 만약에 정부가 그때 무리하고 불합리한 투자 조정을 안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본다. 그랬더라면 발전 설비 부문도 자유 경쟁 체제에서 튼튼하게 자라서 1980년대 중반에 찾아왔던 3저 호기에 방대한 세계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고, 발전 설비 산업도 자동차, 반도체에 못지않은 수출 품목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한때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이 죽어라 고생해서 차려놓은 대한민국의 밥상을 5공, 6공이 지저분하게 먹어치우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때는 아예 밥상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겠는가.” 이병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