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조선페미열전(번외편)-조선의 크로스드레서&페미니스트 김금원
조선의 여류시인 김금원은 14세의 나이로 남장을 한채 금강산 유람길에 올랐다. 사진은 영화 ‘흥부’의 스틸컷. 기사내용과 관계없음.
“여자는 규방 문을 나서지 못하고, 집안에서 술과 음식 만드는 일이나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과연 그것이 옳은가. 옛 문왕과 무왕, 공자와 맹자의 어머니는 모두 덕망이 높았다. 그리고 훌륭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온 세상에 알렸다. 이름을 빛내는 일이 어렵고 드물긴 해도, 어찌 여자만 뛰어난 사람이 없겠는가. 여자라고 규중 깊숙이 들어앉아 그 총명함과 식견을 넓히지 못하고, 끝내 사라져 버리게 된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
위 글은 조선의 여류시인 김금원의 저서 ‘호동서락기’에 담긴 내용이다. 앞서 연재를 통해 조명한 나혜석과 허정숙이 살았던 개화기 시절보다도 더욱 봉건적이었던 조선 19세기, 금원은 이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사회적 차별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배움을 통해 식견을 넓히지 못함은 슬픈 일이라 개탄하기까지 했다. 금원은 이처럼 당돌하고도 호탕했으며, 게다가 똑똑한 여자였다.
물론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여성들이 있다. 시작(詩作)과 예술에 능했던 양반가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유명했고, 역시 재주가 뛰어났던 몇몇 기생들도 곧잘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금원처럼 여성으로서 자아를 자각하고, 여성이기에 시대가 강요했던 차별상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조선시대 여성은 매우 드물다. 감히 말 하건데, 금원은 시대를 앞서갔던 페미니스트였다.
금원은 1817년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원주였다. 옛말에 원주가서 글자랑 하지 말라고 했을만큼 원주는 지식인들이 유명했던 도시였다. 그의 아비는 양반이었지만, 그의 어미는 기생 출신의 첩실이었다. 모계 신분 계승을 원칙으로 했던 조선시대의 금원 역시 훗날 모친처럼 관가의 기생 생활과 첩실로서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원은 어려서부터 뛰어났다고 한다. 과거를 준비하던 금원의 부친은 서책을 읽을 때마다 딸 금원을 무릎에 앉혀 놓곤 했다. 금원은 부친 무릎에서 얼핏얼핏 본 서책을 통해 글을 깨우쳤다. 당시 양반이었던 부친은 그의 총명함에 놀랐고, 바느질 같은 여공을 제쳐두고 금원에게 글을 읽혔다.
금원은 부친의 배려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소학과 동몽선습은 물론 사서삼경과 역사서를 읽었다. 부친은 또한 딸에게 당대 실학사상에 기반한 목민심서 등 명저들을 읽혔다. 금원은 얼마안가 자신의 여동생과 서로 시를 지어가며 놀곤 했다.
게다가 금원의 고모는 여류시인 기각(綺閣)이었다. 기각은 조카딸 금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과부였던 기각 역시 여성의 주체성을 주제로 한 시들을 짓곤 했는데, 둘은 곧잘 편지와 시를 주고받으며 가까이 교류했다.
어찌 보면 금원의 성장에는 남들보다 개방적이고도 배려 깊었던 부친과 뛰어난 여류시인이었던 고모 등 가정적 배경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기각은 일찍이 조카딸 금원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다음은 기각이 금원에게 전한 편지 중 일부다.
“우리 둘 다 깊은 규중 여자의 몸으로 수레 위에 수건과 멍에를 얹었으니 만날 길이 없구나. 멀고 먼 삼백리길 오직 글로 깊은 회포를 보냈더라. 너의 옥 같은 시는 쇳소리가 나듯 쟁쟁하고, 나의 낮은 소리는 모과를 던지는 듯해, 부끄럽구나,” |
기각은 오히려 조카의 글이 자신의 것보다 뛰어나며, 그러한 청출어람을 부러운 듯 격려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금강산 유람’을 살아생전 ‘희망사항’으로 여겼다.
급기야 금원은 14세가 되던 해, 부모에게 깜짝 선언을 한다. 금강산 유람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 금강산은 조선 당대 사대부들의 ‘희망사항’과 같은 의미였다. 살아생전 양반이면 누구든 금강산 유람을 꿈꿨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은 ‘버킷 리스트’로 남은 채 이루지 못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당시 금원이 금강산 유람을 떠나겠다는 것은 여중생이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오지의 절경을 보기위해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겠다는 것과 비교 가능할까. 당연히 지금 대부분 부모들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의미였을 것이다.
당연히 금원의 부모는 모두 반대했고, 금원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무엇보다 여성 단신으로 그 먼 길을 떠나는 것 자체가 위험했고, 사회적으로도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금원은 한 가지 수를 생각한다. 바로 ‘남장’을 한 채, 유람 길에 오르겠다는 복안이었다.
이러한 금원의 열정에 결국 부모 역시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1930년 금원은 어머니가 지어준 남자 저고리를 걸치고 꿈에 그리던 유람길에 오른다. 당시 시대상을 놓고 볼 때, 금원의 남장은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조선에선 당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여자가 남장을 하거나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을 두고 ‘첩자의 행위’로 취급해 엄하게 금지하고 다스렸기 때문이다. 금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위험을 무릅 쓴 ‘크로스 드레서’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겠다.
금원은 호서지방의 제천 의림지를 시작으로 관동팔경, 설악산 그리고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울 구경까지 하고난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금원은 어찌 보면 현대적 의미에서 조선 최초의 여성 탐험가이자 여행가, 산악인이었다.(실제 강원도 속초에 위치한 국립산악박물관에는 한 코너를 마련해 산악인으로서 김금원을 조명하고 있다.)
김금원이 후대에 남긴 여행기 ‘호동서락기’. 출처=KBS 뉴스
금원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모계 신분 탓에 관아의 기생으로 차출됐다. 금원은 ‘앵금’이란 이름으로 기생 생활을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금원은 당시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여성으로서 잘 알려지게 됐다. 게다가 시짓기에 능숙하여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사대부들 중에서도 김덕희는 유독 금원을 아꼈고, 금원은 김덕희의 첩실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남편 김덕희는 부인 금원의 시작과 외부 교류를 흔쾌히 받아들일 정도로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금원은 기생 생활에서 벗어나 유부녀가 되고 나서도 한시를 지어가며 폭 넓은 교류에 나선다. 당대 사대부들과 시를 두고 대결을 하여도 절대 꿇리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금원은 여성들을 한데 모아 모임을 조직하기까지 했다. 그는 서울 삼호정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류 시인들을 모집해 ‘삼호정시사’란 독자적인 시단을 만들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유람을 한 여행기와 한시들을 묶어 엮은 ‘호동서락기’는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금원은 우리 여성사를 논할 때 제대로 조명되고 있지 않지만, 그의 행적과 의미를 놓고 본다면 반드시 조명해봐야 할 매력적인 여인일 것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언더커버-언더커버는 ‘일요신문i’만의 탐사보도 브랜드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커버스토리를 넘어 그 안에 감춰진 안보이는 모든 것을 낱낱히, 그리고 시원하게 파헤치겠습니다. ‘일요신문i’의 탐사보도 ‘언더커버’는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