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조선페미열전2(끝)-남북페미열전 ‘나혜석과 허정숙’ 이야기
한국의 페미니스트 1세대로 꼽히는 나혜석(좌)과 허정숙(우). 둘은 각각 남과 북의 여성 해방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 ‘나혜석’
나혜석이란 인물을 뭐라 딱 정의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워낙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지식인이었기에 그렇다. 그는 국내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경희’라고 하는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을 쓴 소설가이며, 또한 각종 잡지와 신문에 파격적인 글을 기고했던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혜석은 3.1운동에 가담하고, 의열단을 몰래 후원하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녔다. 어찌 보면, 시대를 앞서나갔던 원조 만능엔터테이너의 표상이라 하겠다.
이 장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그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걸었던 페미니스트 ‘나혜석’의 면모를 조명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그는 ‘파격’이었다. 다음은 그가 당시 사회적으로 크나큰 파장을 던진 ‘이혼 고백서(1934년 8월 ‘삼천리’)’의 일부이다.
조선남성 심사는 이상 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 시키는 일이 불 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요. |
남자들의 ‘축첩’이 너무나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나혜석은 여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정조’를 요구하는 그 시대 남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비난했다. ‘이혼 고백서’는 그가 남편의 친구이자 외교관이었던 최린과의 불륜으로 남편 김우영과 이혼을 하게 된 시점에 발표한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앞서나간 정조 개념은 물론 이혼 사유 및 재산 분할 과정까지 모두 공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는 ‘이혼’은 성경은 물론 불경에서도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며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그의 세계관 형성에는 당시 기준으로 보자면, 꽤나 진보적이었던 가정의 분위기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나혜석은 명문가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덕분에 그는 여성임에도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일본 유학을 떠난 최초의 조선여성들 중 한 명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당시에도 우수한 성적 때문에 그의 유학 소식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일본 여자미술학교 유학시절 일본의 페미니스트였던 히라쓰카 라이초의 ‘여성 해방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중매혼이 당연하던 시절, 집안의 중매를 거절한 ‘자유연애 주의자’였다. 사족이지만, 집안에서는 중매를 거절한 나혜석의 학비를 끊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오빠 친구였던 최승구를 사랑했는데 그는 조혼을 한 유부남이었다. 안타깝게도 첫사랑은 지병으로 세상을 뜬다. 나혜석은 스물다섯 되던 해, 첫사랑을 잃은 자신을 묵묵히 위로해줬던 외교관이자 법조인 김우영과 결국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김우영은 사별한 전처 사이에 딸 하나를 둔 남자였다. 당시 그는 결혼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이 지금 봐도 가히 파격적이다. 이 결혼 조건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
나혜석은 ‘현모양처’가 너무나 당연했던 시절, 자신의 직업을 존중해주고 단독으로 살림을 차려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게다가 결혼할 남자에게 첫사랑인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 달라고까지 했다. 놀랍게도 김우영은 나혜석의 요구를 모두 들어줬으며, 심지어 신혼여행지로 최승구의 고향 땅을 함께 찾기도 했다. 물론 훗날 약속 이행은 좀 모호했지만, 그럼에도 남편이었던 김우영은 어마어마한 대인배라 할 수 있겠다.
나혜석의 ‘여성 해방관’ 중 지금도 가장 돋보이는 주장은 ‘혼외정사론’과 ‘실험 결혼론’이다. 나혜석은 앞서 말했듯, 자신의 불륜으로 김우영과 이혼을 선언했는데 그 직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혼외정사는 진보된 사람의 행동”이라며 “누구에게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그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는 ‘사랑과 성욕’에 대해서도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 뿐”이라고 덧붙였다. 가히 시대를 앞서간 여성관이라 하겠다.
자신의 작품 전시회에서 선 나혜석
나혜석은 앞서나간 이혼관 만큼이나 “결혼은 남녀가 만나 살되 마음에 맞으면 평생 가는 것이고,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헤어져야 한다”라며 “결혼 후 맞지 않고도 억지로 참고 견디는 것은 큰 불행”이라고 주장했다.
나혜석이 훗날 우리 여성 해방사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지만, 개인사는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아니, 워낙 시대를 앞서나간 탓에 그는 평생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나혜석은 ‘이혼 고백서’ 발표 이후 다름 아닌 같은 여성들로부터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본인의 ‘자유연애’는 물론 남편의 ‘외도’ 역시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 조선 땅 현모양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심지어 그는 신식교육을 받은 주부들에게 “필요 없는 폭로는 악취미”라며 평가절하의 조롱을 받기도 한다. 나혜석은 그 누구보다도 같은 여성들로부터 받는 이 같은 비난을 몹시 견디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나혜석 역시 4남매를 둔 어머니였다. 이혼 후 전 남편인 김우영은 나혜석이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나혜석은 1948년 52세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자녀들과 함께하지 못했다고 한다.
#‘원조 탈코르셋’ 실천자였던 허정숙
일제 탄압을 받아 수감됐던 당시 허정숙의 모습
아버지 허헌은 훗날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낸 인물로도 유명하다. 허헌은 총명하면서도 당돌했던 딸 정숙을 무척 아꼈으며, 두 사람은 평범한 부녀관계를 넘어 사상적 동지로 함께한다. 특히 허정숙은 일본어와 영어 등 외국어 실력이 뛰어났는데, 아버지 허헌은 외국 길에 오를 때 마다 꼭 딸을 대동했다고 한다.
허정숙 역시 앞서의 나혜석처럼 신식교육을 받는 한편, 청년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 중국, 미국 등 유학을 경험한다. 배화학당에서 수학한 그는 훗날 함께 ‘근우회’를 조직하는 차미리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다만 학업에서 손꼽히던 모범생 나혜석과는 달리 팍팍한 기숙사 생활을 못 견뎌했다. 그는 일본 간사히 학원에서 수학했는데 자퇴와 복귀를 반복하며 입학 6년 만에 겨우겨우 수료했다.
이 같은 오랜 해외 유학생활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회주의 사상을 본격 받아들이는가 하면, 특히 그 연장선상에서 여성해방 운동에도 심취했다.
‘허정숙’ 이름 석 자가 조선 땅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여성 단발 운동’이다. 허정숙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단발 퍼포먼스’를 공개적으로 시행한 여성이었다.
그는 이 단발 운동을 두 차례 진행했는데, 첫 번째는 그가 열여덟이었던 1920년의 일이다. 허정숙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외치던 유림들을 겨냥해 감히 자기 머리를 잘라냈다. 유림들을 정면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유림들을 무척이나 싫어했으며, 그들의 봉건적 태도와 무능이 나라의 병탄을 이끌었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유림들은 남자의 단발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퍼포먼스는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유림들은 그를 두고 모던걸(modern girl)‘을 단발과 엮어 음차해 모단(毛斷) 걸’이라 비아냥거리곤 했다.
허정숙은 5년 뒤인 1925년에도 동지였던 주세죽 등과 함께 다시 한 번 단발 퍼포먼스를 감행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실제 그의 단발 퍼포먼스는 신여성들에게 깊은 영향을 줬고, 장려 운동으로 번지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탈코르셋 운동의 원조 격이라 하겠다.
허정숙은 화가라는 본직이 있었던 나혜석보다 더욱 조직적이고 사회적인 여성운동을 펼쳤다. 훗날 근우회의 한 축이 되는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동우회’를 창립하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앞서 살펴본 근우회의 발기인이기도 했으니, 이 땅의 페미니스트 조직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을만하다.
허정숙은 나혜석만큼이나 급진적인 여성관을 갖고 있었다. 허정숙은 ‘동아일보’ 여성담당 기자로 활동했는데, 다음은 그가 동아일보를 통해 1924년 11월 발표한 ‘여성 해방론’의 일부다.
“여자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다. 우리는 남의 아내와 남의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한갓 그 집안 시부모와 그 남편 한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개성을 살리우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람에게 의뢰하여 사는 기생충이 아니고 완전한 사람이며 한 세상의 인간살이가 남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함이라 하면 우리는 먼저 남과 같이 완전히 자유롭게 살 것을 요구할 것이며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이 선각자인 신여성들의 맹렬히 부르짖음이 있고 굳세게 싸움이 있다” |
이렇듯 허정숙은 특히 여성들의 경제력을 강조했으며, ‘가족’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치부했다. 그는 심지어 “가정은 남편의 노예, 부모의 노예, 자식의 노예, 예의도덕의 노예, 가사노동의 노예, 경제의 노예 속 지옥”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북한의 고위직 시절 중년의 허정숙
그는 신일룡과도 결별하였는데, 훗날 북한 연안파의 핵심이었던 최창익과 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결혼한 최창익과도 이혼을 한다. 최창익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허정숙에게 이혼을 요구했는데, 허정숙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현대판 ‘쿨남쿨녀’ 그 이상이라 하겠다.
사족이지만 허정숙은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계파 숙청이 시작되자 전 남편 최창익을 비판하며 살아 남았다. 최창익은 이 때 처형됐다.
허정숙은 이렇게 확인된 것만 꼭 네 명의 남편 혹은 사실혼 관계의 파트너와 함께 했으며 각기 남편 혹은 파트너 사이에서 성이 다른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일각에선 이보다 더 많은 남성들과 연을 맺었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허정숙의 이 같은 극단적인 자유연애와 결혼관은 사회의 비난은 물론 같은 사회주의 안에서도 부적절하다고 욕을 먹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허정숙은 한 평생 사랑과 섹스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여성의 정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그의 삶 자체가 인습의 저항이었다.
분단 후 북에서 활동한 허정숙은 앞서 나혜석이 힘겹고도 짧은 삶을 살다 간 것과 달리 탄탄대로를 걸으며 장수하다 생을 마감했다. 허정숙은 북한의 내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을 거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설회의 부의장, 당 중앙위 정치국 비서,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91년 6월 5일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 당시에도 수많은 직책을 달고 있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는 후문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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