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덕수 교수는 여성운동가로서 지금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은 손 교수가 반전 시위를 하는 모습(왼쪽). | ||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의 설립재단인 선목학원은 1999년 12월3일 교원징계위원회를 열고 그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손덕수 교수를 해임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손 교수에게 날아온 해임통지서는 모두 33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으로 무려 15가지 항목의 해임사유를 열거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학생 출·결석 및 성적 부당 처리, 주민등록상의 거주지 아닌 지역 거주, 여성복지 강의시간에 여성해방에 관한 강의를 하는 등 교과서 외의 수업진행, 시험지와 과제물의 1년 내 폐기 등이었고, 이런 사실이 교육자로서의 품성과 자질, 성실의무, 복종의무, 직장이탈 금지, 친절·공정의무 및 품위유지의무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손 교수는 위 사유 모두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징계 의결서에 나열된 항목(사유)들은 허위이거나 과장되었다고 맞섰다.
이 사건은 학내에서는 물론이고 학교 밖의 여성, 교육, 종교 등 각계에서 많은 우려를 표명하였고, 설령 학교재단측이 내세우는 사유가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교수에 대한 해임사유는 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사실 성적, 출·결석 부당 처리, 강의내용, 지방대학 교원의 서울 거주 등을 교원에 대한 징계사유로 삼은 예는 거의 없거니와, 학교측이 교수의 교육권 행사 내지 재량권에 속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조사한 것 자체가 ‘마녀사냥’을 연상케 했다.
학교(법적으로는 학교법인 선목학원)와 손 교수 간에 팽팽한 대결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손 교수는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의 재심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
손 교수는 ‘한국여성의 전화’ 공동대표, ‘하월곡동 빈민촌 산골공부방’ 이사장, 대통령정책기획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운동가로, 페미니스트 기질을 발휘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여성해방론자답게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손 교수가 13년간 몸담고 일해온 대학에서 ‘해임’이라는 극형(?) 통지를 받게 된 사단(事端)인즉, 손 교수의 수업방식에 불만을 가졌다는 한 야간 대학원생의 의문스러운 투서에서 비롯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에서 교수의 성적 처리나 강의내용을 가지고 징계를 한 예를 찾기 힘들고, 하물며 해임처분을 한 것은 더욱이나 놀랄 만한 일이었으므로 거기에 무슨 곡절이 잠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아심을 불러일으켰다.
손 교수는 학교측의 해임통지가 교권유린, 성차별, 헌법상의 기본 인권침해라며, 여기에는 손 교수의 페미니즘에 대한 견제와 탄압의 저의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학교측은 손 교수가 1999년 1학기 여성복지 강의시간에 시를 읽어주거나 대체의학, 성 억압, 남녀평등 등 강의와 무관한 주제를 강의하였는가 하면, “매 시간의 결론은 여성해방”이었다면서 이는 분명한 강의 부실이라고 힐책했다.
그러나 손 교수는 이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 사회복지에 대한 자신의 교육철학인 전문성·인성·영성 세 가지가 통합된 전인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제들을 강의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대학측이 교수의 강의내용을 세세히 탐지하여 문제삼았다는 그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어서 각계의 비판을 받았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는 “설사 그 (학교의 해임조치) 사유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귀 대학에 13년이나 봉직해오고 있고 재임용기간을 2년 가까이 남겨놓고 있는 교수를 해임하는 중징계를 내릴 만큼 중대한 사안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강의시간에 여성의 해방을 강조한 것이 교수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징계위의 지적에는 아연한 따름이다”라면서 손 교수에 대한 징계조치는 교수의 교육권을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기본권인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중대한 탄압행위로 보고 엄중 항의한다고 밝혔다.
한국여성단체연합도 공개질의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시급하게 중징계 해임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교수의 자율에 맡겨진 학생 성적 평가에 대하여 대학당국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교수의 자율권 침해가 아닌가. 성적 평가에 대한 부정확성이 설사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교수를 해임까지 시킬 수 있는가. 귀 대학의 교수 해임기준은 무엇인가. 여성학에 대하여 학교 당국이 종교적 기준을 적용하여 편견을 개입시킨다면 이는 학문의 자유 침해가 아닌가.”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역시 공개질의의 형식으로 “형사범이나 사상범도 아닌데 학기 중에 중징계 해임을 해야 했던 사유는 무엇인가. 혹시 강의 내용을 가톨릭교회의 눈으로 잰 것은 아닌가? 성적 평가는 교수의 재량권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표적조사라는 인상을 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번 해임 결의를 한 이상 이를 학교측이 스스로 뒤집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손 교수는 1999년 12월3일 마침내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해임처분무효확인 등’ 재심청구를 했다.
재심청구 사유로는 징계재량권의 일탈·남용과 징계결의의 위법성 등을 14개항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결론으로서, “손 교수에 대한 학교측의 징계처분은 아무런 의무 위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재량권을 남용한 위법이 있으므로 마땅히 취소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못박았다.
교육부 재심위원회는 2000년 2월14일 손 교수에 대한 해임처분을 정직 1월 처분으로 변경하는 결정을 내렸다. 징계사유의 일부는 인정할 수 없다고 판정하면서 해직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재심에서 징계사유가 된다고 열거한 것도 시험 미응시자, 과제물 미제출자, 출석실격자 등에 대한 성적 부여, 성적평가자료 임의 폐기, 휴·보강계획서 미제출, 출강부 허위 날인, 책임시수 불이행(성실의무 위반) 등이었는데, 손 교수로서는 다른 교수들에 대해서는 이런 사유로 징계회부를 한 일이 없었을 뿐더러, 그런 사실 유무를 조사한 예가 없었으며, 바로 여기에 표적조사의 본색이 드러나 있다고 보았다.
재심위로서는 당초 학교가 징계사유로 삼았던 사유 중 손 교수의 강의와 연구가 불성실하다는 부분, 시험답안지 점수를 성적표에 불공정하게 반영했다는 부분, 형식적인 주 4일 근무 부분 등은 징계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재심위는 손 교수가 13년 동안 교육계에 몸담아오면서 다양한 사회참여와 봉사활동을 하여온 점 등을 고려할 때 신분박탈 배제 징계인 해임처분은 과중하다고 밝혔다.
이로써 학교측의 손 교수 해임은 실패로 돌아갔다. 재심 결정이 나온 뒤 손 교수는 총장에게 꽃다발을 보냈다. 그러나 학교측은 이를 정중하게 사절했다.
광주 호남대학 변진흥교수
대학의 재단이사장이 학장을 해임하자 그 학장이 재단이사장을 협박·폭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유죄판결을 받음). 그와 동시에 이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해임무효확인청구소송에서 원고(학장) 승소. 재단 이사장은 위 소송에서 증인으로 나온 같은 대학의 교수 2명을 파면하고 위증죄로 고소. 거기에다 학교측과 이사장의 비리 의혹이 담긴 ‘자료모음’을 낸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 일련의 사태는 참으로 어지러웠다.
한 사학(私學)의 비리 논쟁을 둘러싸고 이처럼 이사장, 학장, 교수가 서로 얽혀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니, 대학의 풍토는 얼마나 어수선하고 흐려졌을까. 광주에 있는 호남대학이 겪은 지난날의 진통과 시련이었다.
나는 위증과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고 기소된 변진흥 교수측의 의뢰로 그 사건의 형사 변론에 나서게 되었다. 1991년 1월의 일이었다. 변 교수측이 말하는 분규의 실상은 이러했다.
호남대학을 설립한 재단 이사장 B씨는 대학의 학사운영, 인사권, 재정문제 등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학생처장을 앞세워 ‘비상대책반’을 구성하였다. 이 대책반에서 학내 비리의 시정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감시·회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행사까지 했다. 또한 평교수협의회와 같은 교수들의 조직을 무력화시켰다.
여기에 분노한 학생들이 1987년 9월, 이른바 ‘9·9사태’ 때 학교측과 충돌한다. 총학 직선제와 학생처장 퇴진 요구를 학교측이 거부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학교 건물시설을 지키는 데 그쳐야 할 소위 구학대(일부 체육학과 교수·학생, 총학 간부들로 구성)가 경찰의 진입 직후 해산하는 시위학생들을 뒤쫓아가 폭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흉기를 휘두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학교측은 비상대책반의 구성, 9·9사태의 발생, 구학대의 활동 등은 일부 시인했으나 분규 충돌의 발생원인과 불법행위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을 했다.
이태영 학장은 이때 학생들의 행동에 동정하는 입장이었으며, “9·9사태 이후에도 재단측의 횡포가 여전하다”는 내용의 재단이사장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사장은 다음날 학장을 자기집으로 불렀다. 학장은 이때 “이사장이 나를 장시간 감금해놓고 욕설과 협박을 했으며, 심지어 골프채로 구타하였다”며 이사장을 협박·폭행 혐의로 광주지검에 고소했고, 이사장은 유죄판결(징역 6월의 선고유예)을 받았다.
싸움은 도를 더해갔다. 학장이 항의성명을 낸 지 1주일 되는 날 이사장이 재단 이사회를 소집하여 학장을 해임하자, 앞서 말한 대로 학장은 광주지법에 해임무효확인소송을 내서 1, 2심에서 승소하였다. 사태가 이처럼 불리하게 되자 재단측은 이사장이 패소한 해임무효확인소송에서 원고측 증인으로 증언을 한 변진흥, 정우식 두 교수에 대하여 파면처분을 내린다(두 교수는 이에 불복하고 학교법인을 상대로 해임처분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위증으로 고소하여 형사법정의 피고인석에 세운다.
공소사실에서 위증이라고 지적된 주요 부분은 세 대목이었다. 그 첫째는 이사장이 학생처장과 체육과 교수들에게 지시하여 체육과 학생을 주축으로 한 친위대 비슷한 조직을 구성하였는지의 여부, 둘째 1987년 9월7일 학생들이 이사장의 횡포와 탄압에 대하여 시위를 한 것인지의 여부, 셋째 이사장과 학생처장은 체육과 교수들에게 지시하여 체육과나 JC학생들로 하여금 총학 자율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구타하도록 하였는지의 여부 등이었다.
변 교수에 대해서는 위증 고소 외에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가 더 얹혀 있었다. <호남대 교권탄압 분쇄를 위한 학원민주화 자료모음>을 간행한 행위를 명예훼손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위 자료 모음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호남대학교권탄압특별대책위원회의 간행물이며, 피고인 개인이 낸 출판물이나 문서가 아니었다. 위 간행물의 내용 또한 호남대의 학내 단체, 광주·전남 지역의 각 대학 교수협의회 등에서 이미 발표한 문건들을 모은 것으로, 피고인 개인의 의사표시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 명예훼손 혐의부분에서는 (1)윤아무개 교수의 강제 해직 여부, (2)“평교수협의회는 학교당국 및 재단의 와해책동에 그 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다”라고 한 대목, (3)“이아무개 학생처장의 각종 비행과 불법행위”를 적시한 대목, (4)“대학의 돈을 백화점의 운용자금과 이사장 자신의 투기사업에 이용하기 위하여 대학 내에 둔 믿을 수 있는 충복이 바로 이아무개 처장이다”라는 대목, (5)○○학원은 “전두환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하였다. 학원을 사설기업화하여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시켰다”라고 한 대목이 문제가 되었다.
변 교수는 법정에서 자신의 종전 증언이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한 것이므로 결코 위증이 아니라고 강력히 항변하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서류나 증인의 진술도 나왔다. ‘자료모음’은 변 교수가 발행인도 아니고 거기 수록된 개별 문건의 발표 주체도 아니었다는 점을 들어 그 배포에 따른 책임을 부정했다.
또 간행물 게재내용이 허위가 아니고, 호남대학의 비리를 바로잡기 위한 일념에서 한 일이지 누구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공소장에 피해자처럼 되어 있는 호남대학재단이나 호남대학에 대해서는 그가 직접 평가도 언급도 한 일이 없었다.
1991년 1월부터 1992년 6월까지 전후 17회의 공판 끝에 (그러니까 나는 이 사건으로 광주에 17번을 왕래하였다) 7월2일에 선고된 1심 판결은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 비록 가볍기는 하지만 유죄판결이었다. 사학의 비리 공방을 둘러싼 학교재단측과의 싸움에서 피고인이 되기도 하고 원고가 되기도 했던 변 교수는 형사사건 항소심의 무죄 판결로 잠시 승리를 거두는 듯했으나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끝내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