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유신·반독재·반외세 언론을 위해 힘쓴 이영희 교수는 자신의 저작물과 방북취재 추진 등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사진제공=한승헌 변호사 | ||
‘이영희 교수’ 하면 그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가 먼저 떠오른다. 박정희 유신통치가 대통령긴급조치 발동으로 극에 달하던 1974년 6월에 나온 이 책은 두고두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청년·학생·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진 ‘고전’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이 교수는 베트남전쟁, 중국문제, 한일·한미관계, 한국언론의 현실문제 등에 관해서 냉전·독재논리에 의한 왜곡을 걷어내어 우리 시대의 지배적 통념의 오류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는 또 2년 후인 1976년 9월에 <8억인과의 대화>를 세상에 내놓았다가 “중공의 경제활동을 찬양하는 등 중공을 이롭게 하였다”는 이유로 판금(販禁)당했고, 다음해인 1977년 8월에 낸 <우상과 이성>은 “반국가 단체인 북한공산집단 및 국외 공산계열인 중공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돼 반공법사건의 피고인이 되기도 하였다(반공법은 81년 국가보안법으로 흡수).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을 복역했다.
1977년 연말에 구속·기소된 그 사건을 나는 변호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75년에 국보법 위반 필화사건으로 묶여들어간 뒤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변호인석 아닌 방청석에서 그 재판을 지켜봐야 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 국제적으로는 냉전질서가 해체되고 신 데탕트시대로 접어들었으며 국내적으로는 1987년의 6월항쟁 이후 민주화 열기와 통일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그런가 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이른바 7·7선언을 통하여 남북대결을 지양하고 상호 교류·왕래를 함으로써 통일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을 공언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 교수는 자신이 논설위원으로 있는 한겨레신문사측과 방북 취재를 협의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뜻밖에도 ‘국보법 위반’이란 화(禍)를 불러들였다.
1988년 8월 어느날, 이 교수는 <한겨레신문> 문학진 기자로부터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취재할 수 있도록 일본에 아는 사람을 통하여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래서 일본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에게 소개장을 써주었으나 결과는 여의치가 않았다.
한겨레신문사는 다음해(1989년) 1월에 다시 방북취재계획을 세운다. 창간 1주년 기념 특집을 위한 취재계획의 일환으로 북한에 가서 북의 고위 당국자를 인터뷰하는 등의 구상이었다.
이 교수는 정태기 이사와 장윤환 편집위원장의 부탁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이와나미(岩波)서점 편집장 야스에 료오스케(安江良介)를 만난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과 만날 수 있다면 이 교수 자신이 기자단을 이끌고 방북하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야스에씨의 요청에 따라 방북 취재를 위한 입북 의사를 밝히고 그 주선을 의뢰하는 내용의 서신을 작성, 야스에씨에게 전달토록 한다. 그 후 서울에 온 야스에씨측의 인사와 만나 방북시기, 체류기간, 취재단의 구성을 알려주는 한편, 캐나다를 통한 단독 입북 의사도 있음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것이 공소사실의 전부(요약)다. 그렇다면 방북취재를 구상·추진하는 단계에서 문제를 삼았으니 이것이 무슨 범죄가 된다는 말인가. 검찰측의 ‘해답’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할 것을 예비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검사들의 ‘명석함’과 ‘지능도’가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한겨레>의 방북 추진은 그 자체로서는 법적으로 사건화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노태우 7·7선언 이후 정부는 대북 비난방송을 중단하였고, 이산가족 서신 교환, 남북 고향방문단의 연내 교류, 남북 대학생 조국순례대행진 등 남북간의 해빙 방침이 정부 각부 장관의 입에서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신문·잡지에 북한이 대대적으로 소개되는가 하면, 북한 간행물의 원전이 남한에서 버젓이 출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엄청나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 한겨레신문사가 방북취재계획을 세우는 일쯤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 문제를 왜 법정까지 끌고 갔을까. 이 교수에 대한 조사에서도 방북취재 계획 자체보다는 이 교수의 유신반대 논조에 대한 추궁이 많았다는 데서 어떤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조선일보>가 평양을 방문하여 취재한 바 있건만 누구도 입건조차 한 일이 없는데 유독 <한겨레>만 문제 삼아 이 교수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한 저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반유신·반독재·반외세 언론을 침묵시키고자 한 보복이었다.
이 교수는 자신의 행위가 실정법에 위반되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야스에씨에게 보낸 서신의 사본도 어디에다 깊이 감추어두지 않고 서재에다 두고 다녔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수사담당자는 방북취재계획과는 무관한 말을 많이 하더라는 것이다. 즉 ‘정부에 협조하는 논문도 좀 써라. 아니면 정부 입장도 잘 생각할 용의가 있다고라도 해라’고 하면서 “이제 그만 좀 해라”는 암시를 주려고 애쓰더라는 것이었다.
변호인들은 “이는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군부독재와 천민자본주의로 얼룩진 이 사회에 양심의 발언을 통해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민중을 각성시킴으로써 독재정권과 독재재벌의 위협이 되어온 피고인에 대한 탄압에 다름 아니다”라고 변론했다. 그러나 판결은 항용 그러하듯이 유죄였다(징역 1년6월에 2년간 집행유예).
변호인단의 면면을 보면 당시 정치범이나 양심수들에 대한 변호에 심혈을 기울이던 변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김창국, 조영래, 박인제, 박원순, 천정배, 이석태, 김형태, 그리고 한승헌이 그들이었다.
굳이 변호인들의 이름을 열거한 까닭인즉, 이 교수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피고인”의 반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징표가 변호인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박창희 교수 | ||
2004년 12월27일 오전,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고문피해자 기자회견’이 국회에서 열려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들의 공개적 증언이 있었다. 거기 나온 여덟 사람 중에 박창희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역사학)의 얼굴도 보였다.
그분은 한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왔을 뿐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바로잡는 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해온 실천적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국민학교’ 이름 고치기 운동은 독보적이었다. 일제 강점하에서 쓰던 ‘국민학교’란 명칭을 반세기 동안이나 맹목적으로 답습·사용하다가 ‘초등학교’로 바꾼 것은 박 전 교수의 선각적인 외침의 결실이었다.
박 전 교수는 일제 잔재 청산 문제, 농촌 문제, 독도사랑운동, 마쓰시로 일본 대본영(大本營) 문제, 강제징용 노무자 문제, 한일농촌교류운동, 농촌잘살기운동(산수유 발효주 개발 등), 환경운동 등 정열적인 활동을 다양하게 병행해왔다.
운동가인 그가 1995년 4월26일 안기부에 의해 구속되었고 ‘박창희 교수 간첩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발표가 나왔다. 거기 적힌 ‘사건의 개요’인즉 이러했다.
박 교수가 89년 8월 일본에서 서태수라는 재일 북한대남공작지도원을 만나 통일운동에 동참하자는 요구를 받고 응락한 다음, 90년 8월 그의 주선으로 4일간 공작아지트에 수용되어 주체사상, 북한 우월성 등에 대한 교양을 받고 포섭되었다. 95년 2월까지 일본과 중국을 30여 회 왕래하면서 서태수와 북한 공작지도부 부부장 등을 접선하고, 국내 정계 고위인사들을 접촉해 활동기반을 구축하면서 각계 동향을 수집, 보고를 하는 등 간첩활동을 해왔으며, 특히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 서태수 입회하에 노동당 입당식을 거행하여 조선노동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활동비 명목으로 공작금 50만엔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사결과’가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변호인들이 박 교수 접견에서 알게 된 사실과 공판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당국이 발표한 ‘수사결과’의 대부분은 ‘고문 결과’였다. 오죽하면 그가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10년 전의 처절한 아픔을 다시 새김질하며 용공조작과 고문을 폭로하는 자리에 70대 노인의 몸으로 나왔겠는가.
변호인들이 검찰 수사단계에서 박 교수를 접견했을 때, 그는 안기부 조사 당시 7~8명의 수사요원들에 둘러싸인 공포분위기 속에서 폭행당한 사실과 검찰에 송치되던 날, 조선노동당 ‘입당’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가 검사로부터 ‘이놈 저놈’ 등의 모욕을 당하고 온갖 폭언과 심지어 발길질까지 당했다는 호소를 하였다.
안기부에서 고문·공포에 못 이겨 허위자백한 부분을 검찰에서 사실대로 뒤집어놓으려고 한 박 교수의 안간힘은 좌절과 체념의 벽에 막히고 말았다. 소위 공안사건에 관한 한 검찰의 한계가 이미 알려진 그대로였던 것이다.
공판과정에 박 교수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여 공소사실의 허구를 주장하고 나섰다. 우선 서태수는 반 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단정할 증거도 없었다. 그는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조선사연구회 등 학회의 간사 일을 맡아보는 한편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해온 학자였으며, 박 교수가 그런 학문연구의 인연으로 서태수와 교분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친족이 남북한 두 지역에 다 살고 있기 때문에 민단이나 조총련 어느 쪽에도 등록을 하지 않고 남북 어느 쪽도 방문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다음으로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3박4일간 머물며 사상교육을 받았다는 점도 허구임이 밝혀졌다. 박 교수는 그 기간에 제자인 김순영씨의 집에서 묵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참으로 허황한 대목은, 사상교육을 위해서 젊은 남자 2명이 호텔 방에 비디오를 설치했다는 검찰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호텔은 그전부터 전 객실에 재생전용 비디오 테크가 이미 설치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것만으로도 검사의 주장은 물론 박 교수의 ‘자백’조차도 허위임이 입증되었다. ‘국가기밀 수집 탐지’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심지어 박 교수가 서씨에게 신장약으로 산수유를 보내주고, “공짜 약은 약효가 없다”면서 상징적인 약값으로 받은 1만엔도 편의제공·금품수수로 기소되었다.
95년 10월20일 선고공판에서 박 전 교수는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공소사실 중 편의제공·국가기밀수집, 금품수수 혐의 등은 무죄 판결이 났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큰 틀인 박 전 교수와 서씨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박 전 교수가 선배 사학자를 통해 6·25 때 헤어져 북한에 살아 있다는 친형의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고, 같은 분야의 연구자로서의 교분을 쌓아나간 과정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한번 내린 1심의 유죄판결은 상급법원에서도 달라지지 않은 채 확정되고 말았다(다만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