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27일 ‘좋은친구산업복지재단’ 임원들과 조찬을 한 뒤 자리를 함께한 조승혁 목사(왼쪽에서 두 번째). | ||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이사장 박형규, 원장 조승혁)에서는 1983년 1월 이사회를 열고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연구’를 그해의 연구조사사업으로 채택했다. 논의과정에서는 정부당국이 그런 사업을 문제 삼을 수도 있으니 보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일부 이사들이 적극론을 펴는 바람에 그대로 가결되었다.
3월부터 사업이 시작되었다. 연구책임은 김용복(목사·부원장), 실무간사는 이미경(현 국회의원)이었다.
그런데 ‘혹시라도’ 하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해 12월15일, 연구교사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유상덕이 연행된 것을 신호로 연구팀 교사 9명이 모두 경찰에 연행을 당했다.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12월30일에는 그 연구사업을 지도하던 강만길, 리영희 두 교수가 경찰에 붙들려 갔다.
12월31일 기사연의 종무예배와 식사가 끝난 뒤인 오후 4시쯤 대공수사단의 건장한 경찰관 세 사람이 와서 조 목사를 연행해갔다. 박처권 단장은 간부들을 배석시킨 자리에서 조 목사에게 “기독교기관에서 이런 강의를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다그치면서 강만길, 리영희 두 교수의 강의 요지를 적었다는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강만길 교수; 6·25는 전쟁이 아니며 내란이다.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다. 리영희 교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은 민주적인 면에서 보면 대민족회의 등 우리나라 통일방안보다 월등히 낫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박 단장이라는 사람은 리영희 교수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8억인과의 대화>라는 책 때문에 조사를 받고 2년간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다. 그런데 이번에 또 걸려들었다. 그는 확신범이므로 사형당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조 목사는 기사연의 책임자로서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한다.
그때 조 목사는 자기를 담당한 수사관들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사팀장인 조한경 ‘상무’는 장로교 신자였다. 고문을 담당한 악연은 홍 ‘부장’ 이었는데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담당 계장인 홍승상 ‘전무’는 조 목사가 1976년 서울시경 대공실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조사받았을 때 담당자였는데, 고문까지 가하면서 모질게 굴던 자였다.
수사관들은 조 목사가 강만길, 리영희 두 교수에게 이러저러한 강의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느냐며 다그쳤다. 사실, 조 목사는 강의를 부탁한 사실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으므로 처음엔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조사관은 두 교수가 그렇게 시인했다면서 조여들어왔다.
▲ 강만길 교수(왼쪽), 리영희 교수 | ||
‘두 교수는 구속되고 혼자만 풀려나갈 수가 있는가’라는 자책감에 조 목사는 괴로웠다. 그는 두 교수가 문제의 강의를 한 것은 전적으로 조 목사 자신의 부탁에 따른 것이라고 (사실과는 다른) 진술서를 써냈다. 그랬더니 수사단에서는 그것을 근거로 삼아 오히려 조 목사까지 구속해버렸다. 뿐인가 북괴찬양, 이적행위를 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조 목사는 두 교수의 석방을 위해서 자신이 적절한 사과를 하고 교계에서 정부에 석방 진정을 하는 선에서 사태를 해결하도록 제의했으나 성사되지 않은 채 검찰로 송치되었다.
1월29일 밤, 그는 보도진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방한복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에 올랐다. 검찰청에 가서 인정신문만 받고서 곧 서울구치소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1주일쯤 지난 어느날, 검찰에서는 구속된 세 사람이 출소할 때 TV인터뷰에 응하여 공개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겠다고 하면 상부에 석방 건의를 하겠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이돈명, 홍성우 두 변호사와 함께 구속된 세 분을 접견했다. 강, 리 두 교수는 조 목사가 뭔가 잘못 진술한 것 같다는 말을 했고, 우리 변호인들은 그 말을 조 목사에게도 전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조 목사는 “나는 그때 두 교수님께서 쓰신 자필 내용은 경찰수사관들이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 추측에 의한 진술(두 교수님을 유리하게 한다는 조건에서의) 때문에 두 교수님이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심했다”고 회고했다.
TV인터뷰 문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은 2월14일 새벽에 서울구치소 문을 나왔다. 그리고 약속대로 KBS-TV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나 검찰이 제시한 각본대로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검찰이 요구한) 공산주의 찬양, 이적 운운의 내용은 빼고, 다만 물의를 일으켜 국민들에게 사과한다는 취지의 말로 얼버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당시 기독교계와 민주화운동권에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의미있는 계기가 되었다.
▲ 지난 2003년 1월, 6·15공동선언 기념 남북공동행사 실무자 접촉을 위해 북에 간 민화협 관계자들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승환 민화협 정책위원장. | ||
1988년 12월에 발간된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의 저자 이승환은 다음해 10월 뒤늦게 국가보안법위반(이적표현물의 제작·배포)으로 구속되었다. 그 무렵엔 ‘신공안정국’이 세상을 긴장시키고 용공과민이 공안파문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 해 가을 이승환은 서울대학교의 <대학신문>에 <199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시론>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일부 언론은 그 글이 용공이라고 공박했다.
문제된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는 종전의 역사서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금기(禁忌)를 무너뜨린 저술이었다. 그때까지는 항일무장투쟁사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정치상황의 제약으로 사실의 규명과 역사의 해석에 한계가 있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해석이 하나의 사상투쟁의 내용으로 화한 것이 장애요인이었다. 그런데 이씨는 대담하게도 이 금지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이 책에 대하여 <동아일보>(1988. 9.8.)는 ‘북한편향적 시각’이니 ‘항일독립운동의 주류를 30년대 만주의 게릴라전투에 귀결시키려는 억지’라는 등으로 공격했다.
저자는 위와 같은 비난에 답할 겸 이 책을 썼다면서, 그 책 서문에서 자신의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 어용역사관 대신 3·1운동→노동자·농민운동→항일무장투쟁을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서 정당히 복원시키는 한편, 남한 매판세력의 역사적 뿌리가 김구·장준하와 같은 애국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 객관적으로 논증하고 학문적으로 검증하려 하였다.”
이어서 그는 일부 역사연구자들의 잘못된 서술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라는 미명하에 민족해방운동세력을 ‘공비’로 매도하고 김일성이 가짜라는 등 일제식민지사관을 답습하는 일부 관변사가들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축소·왜곡하고 타율적 해방론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부분에 대한 내적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
마침내 그는 묶인 몸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고 박원순 변호사와 나는 변호인석에서 이씨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검사와 피고인 간의 논전은 북한에 대한 ‘반국가단체론’에서부터 각이 맞섰다. 물론 검사는 “북한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가 아니냐”고 전단(戰端)을 열었다.
이승환씨는 검사의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즉 “북한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우리 민족 이천만을 구성원으로 하는 또 하나의 주권정부로서, 이를 반국가단체라고 하는 규정하는 것은 현실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도 맞지 않는 70년대의 냉전논리적 북한관”이라고 맞섰다.
다음으로는 피고인 저술의 ‘이적목적’에 대한 공방이 벌어졌다. 이씨는 자신의 연구·저술활동이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거나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 역사관의 오류를 극복하고 민족독립운동사를 재정립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항변했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이 사실이어서 결과적으로 북한에 이로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알려진 부수적 현상일 뿐이라고 했다.
이 단계에서 나는 검사에게 석명을 구했다. “필자의 주장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적이 되는가, 아니면 사실이 아닌 것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날조했기 때문에 이적이라는 것인가.” 검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는 묘한 답변을 했다.
셋째는 김일성의 정체 논쟁 즉 가짜 김일성 시비였다. 변호인들은 이 문제를 객관성 있게 밝혀내고자 한국역사연구회에 사실조회를 해달라고 재판부에 신청을 했던 바, 그 연구회에서는 피고인의 역사 서술을 모두 긍정하는 회답을 보내왔다.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며 따라서 그의 항일무장투쟁도 사실이라는 견해였다.
이씨는 “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역사적 사실을 삭제, 변조하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항일투쟁의 한 장을 말살하여 그 진상을 흐리게 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1부 이귀남 검사는 1990년 4월23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이승환씨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이씨는 최후진술에서 “책의 내용이 북한 역사학계의 주장과 다른 부분이 많고 일제 관헌 및 중국쪽 자료를 중시하여 객관적 입장에서 1930년대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평가했는데도, 냉전시대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는 것은 정권의 무분별한 탄압”이라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러면서도 “피고인의 학문적 열의와 저술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관계가 상당부분 사실로 인정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사건은 종래 한국근현대사의 연구 저술에서 도사리고 있던 금기를 타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김일성 사망 후의 언론보도에서도 그의 약력과 생애를 소개할 때 그가 만주에서 벌인 항일무장투쟁을 사실대로 언급할 만큼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이씨는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중 유신반대시위로 구속된 적이 있으며 지금은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